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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시봉 영혼 스승 김성수 신부 “하나님, 잘 봐주세요” 기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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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3호 16면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9〉 성직자들과의 인연

김성수 신부와 쎄시봉 멤버들. 왼쪽부터 조영남, 한 사람 건너 김 신부의 부인인 김 후리다 여사, 송창식, 김 신부, 윤형주, 두 사람 건너 윤여정.

김성수 신부와 쎄시봉 멤버들. 왼쪽부터 조영남, 한 사람 건너 김 신부의 부인인 김 후리다 여사, 송창식, 김 신부, 윤형주, 두 사람 건너 윤여정.

지난 8회 때 이장희가 초대하는 만찬의 형주와 내가 기억하는 멤버들은 대강 우리 쎄시봉 식구 5명 이외에 누구누구 쭉 나가다가 김성수 신부님까지 간다.

쎄시봉 친구들, 신부 사택 자주 찾아 #영국인 부인, 술·밥타령 다 받아줘 #김수환 추기경에게 절 받는 사진 #90도 인사 뒤 허리 편 순간 찰칵 탓 #불교 노래 녹음했다 미리 실토하자 #김장환 목사 “괜찮아, 스님과 친해”

그렇다. 맨 끝에는 김성수 신부님(전 성공회대 총장)이 등장한다. 독자님들께선 잘 나가다가 웬 신부님? 하실 것이다. 사실 나는 이 자리에 강원룡 목사님과 김장환 목사님, 그리고 한 분 더 김수환 추기경님까지 모셨어야 한다. 이분들이 못 나오신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시차다. 이분들은 내가 이미 가수로 성공하고 나서 만났던 분들이시다. 만찬에 나오셨던 김성수 신부님은 초장에 우리 쎄시봉 식구들과 함께 우리가 유명해지기 훨씬 전부터 동고동락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쎄시봉 훈련소(?)에는 두 분의 스승. 현실 담당 똘강 이백천, 영혼 담당 김성수 신부님이 성립된다고 봐야 한다.

최상현 PD, 윤여정에게 “탤런트 안 해볼래”

그러면 우린 어떤 사연으로 김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는가! 당시 쎄시봉 동료 중 하나였던 윤여정 때문이다. 당시 윤씨는 한양대 1학년이었는데 아주 가깝게 알고 지냈던 연극배우 출신 드라마 PD 최상현 선생이 윤씨한테 “너 TV 탤런트 한 번 안 해볼래?” 해서 팔자에도 없는 배우 길에 들어서게 됐던 것이고 최상현 PD의 배재고등학교 짝꿍이 바로 김성수였던 것이다. 최 PD를 통해서 우리는 김 신부님이 영국에서 신부 수업을 마치고 영국 신부(?)와 함께 서울로 오게 됐다는 것이었고 강화도의 부잣집 아들이라는 것과 함께 고등학교 때 별명은 개뼉다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먼저 최상현 PD의 생김새는 정말 멋졌다. 키도 늘씬하게 크고 미켈란젤로의 조각품 다비드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멋졌다. 게다가 수줍음 띈 미소라니! 최 PD와 김 신부님은 고등학교 때 아이스하키 선수였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별명은 왜 개뼉따귀였는지 지금은 생각이 잘 안 난다. 김 신부님은 윤여정과 최상현 PD를 따라 쎄시봉까지 오게 된 것 같다.

김 신부님과 우리는 만나자마자부터 급격하게 친해진다. “왜 성직자 티가 안 나냐” “왜 천주교 신부가 결혼했냐” “왜 하필 외국 여자와 결혼했냐” “우리 같은 껄렁패와 함께 놀면 신부복 벗게 되는 거 아니냐”, 집요하게 물어도 늘 허허 웃으셨다. 길을 가다가 지나가던 사람이 무례한 행동을 보이면 김 신부님은 당신의 신분도 까맣게 잊고 “저눔의 자식이!” 한다. 난 또 꼬박꼬박 “아이그! 신부님이 무슨 말을 그렇게 얘들처럼 해요” 하면 “야! 시캬 신부는 사람이 아니냐?” 한다.

우리 일행은 걸핏하면 인천 모처의 신부님 사택으로 쳐들어가곤 했다. 거기엔 갓 결혼한 새 신부(김 신부와는 다른 의미다) 외국 여자가 있었다. 우리는 거길 가서 술을 내놔라, 밥을 해내라, 간식을 내와라 하면 외국 아내는 군말 없이 꼬박꼬박 해온다. 우리는 눈치로 알 수 있다. 우리 김 신부님이나 신혼의 외국 아내는 전혀 싫은 내색을 안 하고 최선을 다해서 우리를 보살폈다. 거기 가면 일단 배고픔이 해결되고 잠자리도 해결되었으니 우리가 얼마나 자주 갔겠느냐 말이다. 독자님들께선 우리의 송창식과 특히 인천 건달패 출신이었던, 세상을 떠나가신 박상규 형의 식성을 체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신기한 점이 있었다. 우리가 술타령과 밥타령으로 밤을 꼬박 지새고 아침을 만나면 그날이 일요일에 틀림없는데 우리더러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 한마디가 없다는 것이 너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래라저래라 푸시가 없었던 거다. 우리는 도대체 성공회라는 게 무엇인지, 교회를 다니면 금방 성공한다는 뜻일까. 그때는 그걸 몰랐다. 아니다. 관심도 안 뒀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선교 같은 일에 관심을 안 두는 김성수 신부님을 그냥 주변머리 없는 개뼉따귀 신부님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다.

시각장애인 행사에서 만난 조영남씨와 고 김수환 추기경. 서로 인사한 후 조영남씨가 먼저 허리를 펴는 바람에 인사를 받는 모양새다. 조영남씨가 사진을 활용해 2005년 미술작품으로 제작했다. [사진 조영남]

시각장애인 행사에서 만난 조영남씨와 고 김수환 추기경. 서로 인사한 후 조영남씨가 먼저 허리를 펴는 바람에 인사를 받는 모양새다. 조영남씨가 사진을 활용해 2005년 미술작품으로 제작했다. [사진 조영남]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되어 미국엘 가서 종교에 관해 공부하면서 그때야 아하! 그게 바로 영국의 헨리 8세 때 왕손을 못 이어가던 본부인을 내치고 앤 불린이라는 다른 왕비를 맞을 때에 지구상 최대의 권한을 쥔 로마 황제로부터 꼭 이혼을 허락받을 필요 없이 법적으로 교황의 영역에서 벗어나 영국만의 교회를 만들자 해서 종교사적으로 분리가 된 영국 기독교가 바로 성공회였던 것이다.

나는 신부님 냄새도 안 풍길 뿐 아니라 길을 가다가 수틀리면 “이 자식이 저 자식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우리와 다른 점이 어느 구석에도 없는 성공회 신부님이 과연 신부님 노릇이나 제대로 할까 싶었는데 내가 쎄시봉 식구들 중에서 제일 먼저 ‘딜라일라’라는 외국 노래 한 곡으로 높이 떴고, 우리들 모두의 영혼 담당 리더였던 김 신부님의 근황이 늘 궁금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따금 고개를 돌려 볼 때마다 우리의 김 신부님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신부님은 금방 큰 교회의 담당신부로 올라가고 우리는 늘 “뭐라구? 그 신부님이 성공회에서 제일 높은 주교가 됐다구? 뭐? 성공회대 총장이 우리가 아는 그 김성수 신부님이라구?”, 묻게 됐다. 우리는 그렇게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김 신부님의 기도 스타일이었다. 보통 목사님들과는 패턴이 너무나 달랐다. 하나님을 그냥 형제나 이웃 아저씨나 우리들의 맏형쯤으로 대하는 것 같았다. 보통 늘 쓰는 하옵고, 하옵시며, 라는 식의 수식어가 전혀 없었다. 우리끼리 그냥 대화하듯 “하나님 안녕하세요! 오늘 우리들은 또 모였습니다. 잘 좀 봐주세요!” 하는 식이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조금 있다가 서울 시청역 옆에 있는 성공회 본당으로 옮겨 가시고, 또 얼마 있다가 주교로 올라가시고, 또 얼마 있다가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대주교로 올라가고 심지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바른 소리가 많이 나오는 성공회대학교 총장까지 올라가셨다. 그때마다 우리는 “엉터리 신부가 어째서 자주 그렇게 높게만 올라가냐” 입방정을 떨 때마다 신부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 나라에 인물이 없는 거지 뭐” 대답했다. 내가 요즘도 써먹는 “인물이 없다”라는 술어는 그때 신부님한테 배운 말이다.

강원룡 목사, 통기타 치고 찬양 부르게 해

나는 그렇게 살질 못했다. 그 반대로만 살았다.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명예와 돈만 좇았다. 그럴 때마다 우리 김 신부님은 한 번 한 마디쯤 “야! 임마 정신 좀 차려라” 할 법했지만, 그럴 권리를 가지고 계셨지만 지금까지도 단 한 번 이래라저래라 한 적이 없다. 물론 수양딸로 귀여워했던 윤여정한테도 이래라저래라 했을 수가 없다. “하나님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귀여운가.

만일 살아만 계셨더라면 내가 우겨서 우리 만찬에 모셨을 뻔한 경동교회의 강원룡 목사님도 정말 귀여우셨다. 우리 쎄시봉 식구들이 막 뜨고 있을 때 우리를 찬양의 밤에 정식 초청한 것은 우리나라 기독교 음악사상 통기타를 들고 교회 강당에서 찬양을 부르게 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우리의 기타를 치는 교회 음악회는 당연히 큰 호응을 받아냈다. 그 후에 우리를 만나면 마치 어린아이처럼 “내 얘기가 맞지? 통기타를 치면서 교회음악을 해도 괜찮게 됐지?” 하시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던 기억이 새롭다.

김수환 추기경님도 역시 귀여우셨다. 한번은 한·일 시각장애인 축구대회가 한강 변에서 개최된 적이 있다. 나는 우리나라 가수대표로 영광스럽게 국가 제창을 리드하는 가수로 뽑혀 그 자리에 갔었다. 귀빈석이 따로 넓게 마련되어 있었는데 정작 참석한 우리 쪽 인사는 김수환 추기경님과 나 한 사람뿐이었다.

나는 한양대학 때 바이올린 전공의 일찍 죽은 내 친구 병훈이를 따라 시각장애인 학교를 방문한 기억이 있어서(병훈이는 그때 장애 아동들에게 바이올린을 티칭했다) 알고는 있었다. 축구공에 소리가 요란하게 날 수 있는 물질을 넣어 청각으로 방향과 거리를 조정해 축구를 하는 건데 김수환 추기경님이 나타나자 나는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드렸는데 내가 허리를 다시 편 순간 어느 기자가 셔터를 눌러 김 추기경님이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혔다가 느리게 허리를 펴는 바람에 마치 내가 김 추기경의 절을 받는 광경으로 바뀐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우스꽝스러운 사진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장면을 바꾸어, 한 달 전쯤 나는 정대철(전 국회의원) 형과 함께 신촌 홍대 옆에 있는 극동방송 회장으로 계신 김장환 목사님과 점심을 함께 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내가 이렇게 말씀드렸다.

“목사님! 제가 젊었을 때는 교회가 저를 먹여 살렸는데 제가 늙었을 때는 사찰에서 저를 먹여 살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에 불교 노래 10여 곡을 녹음했습니다” 말씀드렸더니 역시 쿨하게 “괜찮아! 나 스님들하고 친해” 이렇게 받아주었다.

그럴만한 사연이 따로 있었다. 몇 년 전 나는 미술 대작 사건으로 형사고발을 당했을 때 집만 남기고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날렸었다. 변호사 비용이나 미술 환불 처리로 말이다. 그때 부천 소재 석왕사라는 사찰에서 연락이 왔다. 공식적으로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공연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석왕사에서는 음력 4월 초파일 석가 탄신일에 산사음악회를 청탁하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 음악팀과 함께 멋진 공연을 해드렸다. 석왕사에서는 음악회뿐만 아니라 나의 미술 전시도 열게 해주었다. 불교 본당을 미술관으로 임시 조정해 전시회를 열었던 거다.

그다음 해에도 석가탄신일에 조영남 특별 콘서트를 열게 해주었고 믿거나 말거나 또 그다음 해에도 음악회를 열어주었다. 재판을 받는 내내 무려 네 번씩이나 똑같은 가수의 똑같은 노래를 들어주었다. 관중은 해마다 늘어나 3000명 이상이나 운집했다. 작년에는 부득이 콘서트를 개최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불교 노래를 CD 한 장 분량 녹음을 해주는 게 어떠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나는 고심고심하다가 가수는 광대이고 광대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곳에서 가진 재능을 발휘하는 게 정답이다 싶어 열심히 녹음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만일의 경우 어느 방송에서건 “다음은 조영남씨의 ‘옴마니반메훔’을 듣겠습니다” 했을 때 김 목사님이 얼마나 놀라실까 걱정되어 미리 말씀을 올렸던 것이다. 아! 숨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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