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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만에 이런 일 처음…직원 줄이다 공장까지 내다 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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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일감이 끊겨 직원도 내보내고 빚으로 연명하는 중소기업이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소기업에 대출만 늘려주기보다 세금이나 공과금 같은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진은 안산공단의 한 공장 모습 [중앙포토]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일감이 끊겨 직원도 내보내고 빚으로 연명하는 중소기업이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소기업에 대출만 늘려주기보다 세금이나 공과금 같은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진은 안산공단의 한 공장 모습 [중앙포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십년을 해 왔는데 어떻게든 버텨야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장기화하면서 뿌리산업인 중소 제조기업들이 무너져내리고 있다. 일감이 끊겨 대출 받아다 직원 월급을 주거나 운영비로 쓰고, 또 이자를 갚지 못해 더 큰 빚을 내는 악순환에 빠진 기업들이 많다. 서울 중랑구에서 운동복 공장을 운영하는 노희일(55)씨는 21일 "코로나로 매출이 절반 이하로 꺾여 공장문을 닫기 직전"이라며 "소상공인진흥공단에서 8000만원을 빌렸는데 이자도 못 갚고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장기화에 빚의 수렁에 빠진 중소기업

"일감 줄어 직원 내보내고 대출로 연명"

노씨는 유명 브랜드에 납품하면서 연 매출 6억~7억원을 올리던 조그만 업체를 6년째 운영 중이다. 중학교 졸업 후부터 섬유공장에서 40년 넘게 일하다 직접 차린 공장은 그에게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노씨는 "작년 추석 때만 해도 코로나 여파에도 운영이 제법 괜찮았다"며 "하지만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 모를 정도로 길어지면서 올해 들어서는 일감이 갑자기 확 줄었다"고 했다. 그는 20여명씩 쓰던 일용직을 10여명으로 줄였다. 그는 “인력을 더 줄여야지만 그렇다고 마구 줄였다간 필요할 때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며 “일감이 드문드문해도 직원을 유지하다 보니 월급이나 임대료를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다"고 말했다.

서울 가산동에서 책 표지를 만들던 유모(65)씨는 지난 1월 공장을 아예 경기도 일산으로 옮겼다. 가산동의 월 임대료 600만원을 감당할 수가 없어 300만원만 내는 일산으로 둥지를 이전한 것이다. 그는 “코로나가 장기화하면서 쌓인 빚만 4억원이 넘는데 몇달 전부터 이자도 못 갚는다"며 "직원도 절반으로 줄였고 다달이 내는 임대비라도 줄이려고 이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코로나19로 일감이 줄어든 중소기업들은 거의 빚으로 연명하고 있다. 그 사이 매출과 고용은 계속 쪼그라들고 있다. 중소기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1~3분기 중소기업의 매출은 계속 감소했고(-1.3~-4.9%씩), 그에 따라 중소기업 취업자 수 역시 지난해에만 1만 9000명이 줄었다. 매출이 줄어든 중소기업들은 노씨나 유씨처럼 대출에 의존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기업 대출 잔액은 976조4000억원으로 1년 전에 비해 107조4000억원 증가했다. 지난해 말 기준 중소기업 대출도 804조6000억원으로 같은 기간 87조9000억원 급증했다.

최근 들어서는 은행들이 중소기업에 대한 문턱을 높이면서 대출받기도 어려워졌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최근 은행이 대출심사요건을 강화하면서 대출을 신청하는 중소기업도 줄었다"고 전했다. 김희중 중소기업중앙회 정책총괄실장은 "중소기업들이 정부의 대출 지원 정책을 통해 지난 1년은 어떻게든 버텨냈다"며 "하지만 올해는 누적된 대출의 원리금 상환도 버거워 무너지는 중소기업이 더 많이 생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중소기업대출금액추이.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중소기업대출금액추이.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올해 들어 폐업하는 중기도 크게 증가   

일감이 줄고 대출도 어려운 중소기업의 선택지는 결국 폐업이다. 법원경매 정보업체 지지옥션에 따르면 올해 1~3월 전국 공업시설(공장·아파트형공장·제조업소·공장용지) 경매 누적 진행 건수는 1108건으로 전년 동기(877건)보다 크게 늘었다(26.3%). 지지옥션 관계자는 "특히 올해 들어서는 월별 경매 진행 건수가 3개월 연속 증가하면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폐업을 결정해도 폐업까지의 길은 쉽지 않다. 경북 구미에서 자동차 부품업체를 운영 중인 박모(62)씨는 "코로나가 계속돼 일감이 줄어 폐업을 하고 싶지만 공장을 팔아도 직원들 퇴직금이나 대출금을 갚고 나면 남는 게 없다"고 했다. 그는 "우선 공장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서지 않는다"며 허탈해했다.

국제 원자재가 상승으로 경영난 가중  

중소기업들은 여기에 올해 원자재값은 코로나19 이전보다 편균 30~40%가 올랐지만 납품가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다고 호소한다. 경기도의 한 구리합금 주조업체 A사의 김모 영업본부장은 “원자재값은 올랐는데 공장 돌려 대출금 갚아야하니 수주 경쟁이 치열해 납품 단가나 판매가격은 오히려 떨어졌다”며 “요즘 중소제조업 대표들은 어떻게 손 털고 나갈지만 궁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민선 중소기업연구원 미래전략연구단장은 “코로나19로 진 대출에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며 이중고를 겪고 있는 중기 제조업체가 늘고 있다”며 “경제회복 시점이 예상보다 지연될 것으로 보여 중소제조업 간 양극화도 심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조세나 공과금 부담 완화해 줘야" 

전문가들은 “한국경제의 모세혈관인 중소제조업의 생존력 제고를 위해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며 “빚(대출)만 계속 늘려주는 건 올바른 처방이 아니고 업종별 핀셋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문한다. 노 단장은 “코로나19 장기화에 맞춰 사업 전환을 도와주는 일본 정부의 정책 지원을 참고할 만하다”며 “예컨대 항공기 부품 만들던 회사는 의료기기 제조로 사업 전환이 가능하고, 호텔은 원격근무 오피스로 활용하는 식으로 사업 재구축에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수출은 꾸준히 회복세지만 대면 소비 악화는 계속돼 중소상공인이 매출이 늘지 않고 있다"며 “중소상공인에게는 조세 부담 등을 줄여주는 방안을 서둘러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준모 고려대 교수는 “지금은 대출로 버티는 중소제조업이 조만간 한계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다"며 "고용 유지 등을 달성하면 대출을 보조금으로 전환해주거나 전기요금을 감면해 주는 식의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백민정·이병준 기자 lee.byungju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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