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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퍼스펙티브

한·미 반도체 동맹 깨지면 ‘멜로스의 비극’ 기다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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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미·중 반도체 전쟁, 한국의 선택은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기원전 416년, 고대 그리스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스파르타와 싸우던 아테네가 에게 해(海)의 소국 멜로스에 사신을 보냈다. 중립을 표방하는 작은 섬나라가 배후의 위험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자신들이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에 들 것을 요구했다. 멜로스는 ‘정의와 선’을 내세우며 거절했다. 사신이 말했다. “강자는 그들이 할 힘이 있는 것을 하는 것이며, 약자는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테네는 결국 힘으로 멜로스를 응징했다. 남자들은 학살하고 여자들은 노예로 팔아버린 뒤 자국민 500명을 이주시켰다.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소개된 ‘멜로스의 대화’라는 일화다.

미국은 핵심기술 보유 절대 강자, 중국은 아직 반도체 약체국 신세 #대만은 일본 손잡고 노골적 미국 편들기…좌고우면 한국 고립 위기 #‘코어 테크’ 반도체 경쟁력 잃으면 국제사회 우리 운명도 장담 못 해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낀 멜로스처럼 한국도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있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늘 어깨를 누르고 있다. 다행히 세계 10위 경제 규모 한국은 멜로스처럼 마냥 ‘약자’는 아니다. 특히 21세기 전략 물자이자 ‘코어 테크’인 반도체를 쥐고 있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이 연 한국·대만의 반도체 지평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2일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반도체 기업 CEO 화상회의’에서 실리콘 웨이퍼를 손에 들고 공급망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왼쪽 사진). 시진핑 국가 주석이 2018년 4월 중국 우한의 반도체 기업을 찾아 관계자들과 함께 생산 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EPA·신화=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2일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반도체 기업 CEO 화상회의’에서 실리콘 웨이퍼를 손에 들고 공급망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왼쪽 사진). 시진핑 국가 주석이 2018년 4월 중국 우한의 반도체 기업을 찾아 관계자들과 함께 생산 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EPA·신화=연합뉴스]

한국 반도체 산업의 결정적 기회는 1986년 맺어진 미·일 반도체 협정이었다. 그 전해 인텔이 D램 사업에서 손을 뗄 정도로 당시 일본의 반도체 공세는 거셌다. 미국 정부는 NEC·히타치·도시바 등 일본 기업에 대한 반덤핑 조사에 나섰다. 플라자 합의와 보복 관세라는 연타를 맞은 일본은 외산 반도체 점유 비중을 20%까지 올린다는 골자의 협정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한국이 D램에서 일본과 ‘치킨 게임’을 벌일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물론 미국이 한국을 위해 일본을 누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도체에 뛰어든 삼성전자를 두고 인텔은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비웃었다. 우리 기업과 노동자, 정부의 노력이 없었다면 신화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신화가 탄생할 수 있는 무대는 결과적으로 미국이 제공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은 삼성전자와 파운드리(위탁생산) 경쟁을 벌이는 대만 TSMC도 마찬가지다. TSMC는 미·일 반도체 협정 이듬해인 1987년 설립됐다. 창업자는 중국 저장(浙江)성 닝보(寧波) 출신의 장중머우(張忠謀·모리스 창). 10대 때 미국에 이민 가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 부사장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1985년 대만산업기술연구원(ITRI) 원장 제안을 받고 대만으로 온 그는 파운드리라는 새로운 사업 모델에 주목했다.

초기 반도체 회사들은 설계와 제작을 다 하는 종합업체(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IDM)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점차 공정이 미세·복잡해지면서 제조를 위해서는 대규모 설비 투자가 필요해졌다. 미국 반도체 업계는 이런 부담을 피해 설계 자산과 사람만 남기고 제조는 남에게 맡기는 팹리스(fabless)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미국발 국제 분업의 새로운 흐름을 대만 정부와 장중머우가 낚아챈 것이다.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 56%(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 2021년 1분기 자료), 전 세계 반도체 업체 시가총액 1위라는 오늘날 TSMC 신화의 시작이었다.

노골적으로 미국 쪽에 서는 대만

미·중 반도체 전쟁에서 대만은 노골적으로 미국 편에 섰다. 중국 화웨이에 대한 미국의 제재가 본격화한 지난해 9월. 대만의 차이잉원 총통이 트위터에 사진 하나를 올렸다. 차이 총통 좌우에 대만을 방문 중인 키스 크라크 미 국무부 경제차관과 2018년 TSMC 회장에서 물러난 장중머우가 서 있는 사진이었다. 31년간 TSMC를 경영한 장 전 회장은 ‘대만 반도체의 대부’로 불리며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차이잉원은 이 사진 하나로 TSMC를 지렛대로 하는 반중·친미 메시지를 분명히 했다. TSMC는 이미 사흘 전, 미국 요구에 따라 중국 화웨이에 대한 반도체 공급을 중단했다.

의미심장한 것은 중국의 반응이다. 미국과 대만의 밀월에 중국은 대만 해역에 폭격기를 띄우며 무력시위에 나섰으나 막상 TSMC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비난은 하지 않았다. 중국의 다급한 반도체 상황 때문이다.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은 겨우 16% 선. 우주·군사·인공지능 등 분야에서 만만찮은 첨단 반도체 설계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제조는 TSMC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최근에는 중앙처리장치(CPU) 설계업체인 페이텅(飛騰)이 군사용 슈퍼컴퓨터 제작과 관련됐다는 이유로 TSMC로부터 주문을 거절당했다. 중국은 TSMC와 완전히 등을 돌릴 경우 군사 외 일반 반도체 수급마저 차질을 빚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시진핑 정부는 ‘중국제조 2025’ 계획을 통해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이 추세라면 20%도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중국은 ‘반도체 약체국’ 처지를 곱씹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미-대만-일 반도체 삼각 동맹 움직임

TSMC가 적극적으로 미국 쪽에 서는 이유는 뭘까. TSMC의 지분 6%를 가진 대만 정부의 적극적 의지가 반영됐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만으로 자칫 대만 경제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는 도박을 한다고는 보기 힘들다. 그보다는 미·중 반도체 전쟁의 승산은 결국 미국에 있다는 판단에 따른 전략적 선택이라고 봐야 한다. 거대한 싸움판에서 어정쩡한 중립을 지키다간 국제 반도체 분업 구조에서 쌓은 위치를 한순간에 날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최근 세계 반도체 업계는 TSMC의 일본 내 거점 설립 뉴스에 주목했다. 이바라키현 쓰쿠바시에 200억엔을 투자해 연구소를 짓는 방안을 최종 조율하고 있다는 니혼게이자이의 보도다. 연구소에 이어 반도체 후공정(패키징) 라인 설립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를 전략 산업으로 보고 보조금 지급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TSMC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미국 애리조나에 짓고 있는 공장을 대거 확충할 뜻도 비친 상태다. 한국이 미국 편에 서느냐, 중국 편에 서느냐를 저울질하는 동안 벌써 TSMC는 미-대만-일본의 반도체 분업 체계의 중심축이 돼가고 있다.

TSMC는 생산 확대를 위해 앞으로 3년간 1000억 달러(113조원)를 투자할 계획을 밝혔다. 투자액의 80%를 삼성전자와 경쟁을 벌이고 있는 3·5·7㎚(나노미터) 첨단 공정 개발에 사용할 것이라고 공언한 상태다. 이대로라면 파운드리 부문에서 TSMC를 따라잡겠다는 삼성전자의 야망은 쉽지 않아 보인다.

반도체 동맹 소외되면 영원히 처질 수도

한국과 대만의 처지가 같을 수는 없다. TSMC는 60%에 달하는 애플·AMD·퀄컴 등 미국 고객사의 주문량을 믿고 중국에 큰소리치지만, 삼성전자의 대(對) 중화권 수출 비중은 40%에 이른다. TSMC는 중국에 이렇다 할 생산 시설이 없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시안(西安)·쑤저우(蘇州)와 충칭(重慶)에 대규모 공장을 갖고 있다. 중국의 경제 보복 여지도 반도체 일변도의 대만보다 훨씬 크다. 한국으로선 대만보다 훨씬 어려운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문제는 복잡해도 해법은 단순하다. 결국 기업 경쟁력과 국제 동맹이다. 굳건한 민·관 협력과 과감한 투자로 우리가 보유한 전략 자원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 미국이 중심이 된 국제 반도체 분업의 한 축을 굳건히 지켜야 함은 물론이다.

메모리 일변도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약점으로 꼽히지만, 역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발주-수주 관계로만 따지면 ‘을’이 돼야 하는 TSMC가 ‘슈퍼 을’을 넘어 ‘갑’이 된 것은 50%대가 넘는 파운드리 점유율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D램 70%, 낸드 40%의 점유율은 한국에 힘이 될 수 있다. 극자외선(EUV) 장비를 도입한 5나노 공정 기반 제품과 7세대 수직구조(V)낸드 등은 당분간 경쟁업체들이 따라오기 힘든 기술력이다. CPU에 주력하는 인텔은 최근 파운드리 사업에 나설 계획을 밝혔지만 미세 공정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성능 CPU 생산을 TSMC나 삼성전자 등에 맡길 것이라는 예측마저 나온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미국의 투자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반대급부로 미 정부에 파운드리 사업에 대한 직·간접 지원을 요구하는 시나리오도 거론되고 있다. 자만해서는 안되지만, 위축될 필요도 없다는 이야기다.

중국 시장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세계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은 여전히 미국에 있다. 장비와 소프트웨어 등의 핵심 기술은 아직 ‘넘사벽’의 수준이다. 미·중 패권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어정쩡하게 있다가는 ‘멜로스의 비극’이 남의 이야기가 되지 말란 법 없다. 그 비극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운명을 쥘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부터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