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펀드 공포증’ 은행들 수탁 퇴짜에 해외서 돈 쓸어간다

중앙일보

입력 2021.04.22 00:04

지면보기

경제 01면

2년 전 대체투자 전문 자산운용사를 설립한 A대표는 요즘 밤잠을 못 이룬다. 그는 올해 초부터 국내 물류센터에 투자해 임대 수익을 낸 뒤 투자자들에게 배당금을 나눠주는 사모펀드를 준비했다. 기관 투자가의 자금도 2500억원가량 끌어오기로 했다. 순조롭게 진행하던 사모펀드 설정 계획은 수탁사를 찾아 계약하는 단계에서 막혔다. 펀드 수탁사들은 신생 운용사라는 이유로 수탁 계약을 거부했다. A대표는 “이러다 올해 펀드를 하나도 못 만들고 회사 문을 닫는 게 아닌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라임 후폭풍, 사모펀드 고사 위기
“돈 맡아달라, 40차례 계약 무산”
수탁계약·설정액 1년새 반토막
수수료 0.02%인데 잘못하면 덤터기
은행 책임 더 강화한 법 10월 시행

중견 운용사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10년간 나름 탄탄한 성과를 내왔다고 자부하는 운용사의 B대표도 수탁사를 찾지 못해 포기했다. 그는 인도네시아·태국 등 동남아 증시 상장 기업에 투자하는 사모펀드를 구상했다. B대표는 “현지 실사 등으로 리스크를 줄일 방법을 내놨지만 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모펀드 업계가 ‘고사’ 위기에 처했다. 수조원대 펀드의 환매를 중단한 라임·옵티머스 사태 이후 수탁사들이 ‘몸 사리기’에 나서면서다. 이런 여파로 운용사들이 새로운 펀드를 내놓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사모펀드 신규 설정 건수, 1년 새 ‘반토막’.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사모펀드 신규 설정 건수, 1년 새 ‘반토막’.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새로운 펀드가 세상에 나오려면 운용·판매·수탁사의 세 곳이 필요하다. 운용사는 펀드를 설계하고 투자자가 맡긴 돈을 굴리는 역할을 한다. 증권사·은행 등은 고객을 모집해 펀드를 판매한다. 수탁사는 펀드에 들어온 자산을 보관하고 운용사의 지시에 따라 주식이나 채권을 사고파는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은행이 수탁사를 맡는다. 자본시장법에 따라 은행 등 수탁사 없이 운용사가 펀드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국민의힘 이영 의원실이 금융감독원에서 받은 ‘은행권 펀드 수탁 계약 현황’에 따르면 국내 은행 여덟 곳(신한·하나·우리·농협·부산·산업·SC제일·씨티)의 사모펀드 수탁 계약은 지난해 2168건이었다. 2019년(4567건)보다 52% 줄었다.

하나은행의 펀드 수탁 계약은 2019년 월평균 120건을 넘었다. 지난해 상반기에는 월평균 70건으로 줄었고 지난해 9월 이후는 10건 초반으로 뚝 떨어졌다. 우리은행의 펀드 수탁 계약은 지난해 월평균 25건으로 1년 전(40건)보다 40% 가까이 줄었다.

사모펀드 시장은 급격히 위축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사모펀드 신규 설정액은 63조820억원이었다. 1년 전(110조6238억원)보다 43% 감소했다. 지난해 새로 나온 사모펀드는 2592개였다. 2016년부터 2019년까지 매년 6000개 이상 나오던 것과 비교하면 많이 줄었다.

주요 은행의 사모펀드 수탁 계약 건수 변화.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주요 은행의 사모펀드 수탁 계약 건수 변화.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금투협은 이달 초 250여 개 운용사 대상으로 ‘펀드 수탁 거부 관련 사례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에 응답한 운용사의 20%(51곳)는 “사모펀드 신규 설정에서 한 번 이상 수탁 계약이 거부됐다”고 답했다. 이 중 한 곳은 “지난해 6월 이후 40차례 수탁 계약이 무산돼 사모펀드를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금투협 관계자는 “100억 미만의 소규모 펀드, 부동산이나 ‘메자닌’(주식과 채권의 중간 성격을 지난 상품) 투자 비중이 높은 펀드는 리스크 점검이 어렵다는 이유로 수탁 계약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은행 등이 사모펀드 수탁 계약을 꺼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은행이 받는 돈(수탁 수수료)은 적은 데 책임은 훨씬 커졌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은 지난해 7월부터 수탁사도 사모펀드를 감시·감독하도록 했다. 사모펀드에 이상 징후가 있으면 운용사에 시정을 요구하는 것도 수탁사의 몫이다. 수탁사의 감시 책임을 한층 강화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지난달 국회를 통과했다. 오는 10월부터 시행한다.

“수탁사 유인할 펀드 수수료 개편 등 시장 숨통 터줘야”

수탁사가 받는 수수료는 펀드 설정액의 0.02~0.04%에 불과하다. 1000억원 규모의 사모펀드 수탁을 맡더라도 수수료는 최고 4000만원이란 얘기다. 은행권 관계자는 “쥐꼬리만 한 수익과 비교해 책임이 과중하다”고 말했다. 그는 “수탁 위험을 낮출 체크 목록을 만들었다. 부동산·사모사채 등 비시장성 자산이 많거나 설정액이 작은 사모펀드는 제외하고 있다”고 전했다.

기존 사모펀드의 주요 고객이었던 소규모 기금이나 공제회 등은 마땅한 투자처를 찾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국내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자금을 해외 운용사가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금융당국도 해결책을 찾고 있다. 지난 2월부터 수탁 업무 태스크포스(TF)를 운영 중이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수탁 업무 관련) 모범규준이 나오면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제시돼 혼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수탁사의 규제 비용을 고려한 유인책이 필요하다”며 사모펀드 수수료 체계를 개편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익명을 요구한 운용사 대표는 “한국증권금융 등 공공성 있는 기관이 수탁 업무를 확대해 일단 업계의 숨통을 터줘야 한다”고 말했다.

자산운용사들이 지분을 출자해 전문 수탁사를 설립하는 방안도 업계에서 거론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이런 회사가 펀드 수탁 업무를 할 수 있게 허가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함께 나온다. 글로벌 헤지펀드 전문 수탁사인 시트코는 약 1조1000억 달러를 관리하며 세계 50여 곳에 지점을 갖고 있다. 이영 의원은 “불완전 판매 등 위법 행위는 엄단해야 하지만 이것이 수탁 기피나 시장 붕괴로 이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사모펀드 시장이 순기능을 회복될 수 있도록 금융당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염지현 기자 yjh@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