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과거사 갈등에 '방사능 공포'까지…재점화한 '반일감정', 벼랑 끝 몰린 한·일 관계

중앙일보

입력

오는 21일 김복동 할머니 등 2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선고가 이뤄진다. 지난 1월 배춘희 할머니 소송 선고와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묻는 판결이 나올 경우 한일 간 과거사 갈등은 한 층 격화할 전망이다. 사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다큐 '어폴로지'에 담긴 김복동 할머니, 길원옥 할머니의 모습. [사진 영화사 그램]

오는 21일 김복동 할머니 등 2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선고가 이뤄진다. 지난 1월 배춘희 할머니 소송 선고와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묻는 판결이 나올 경우 한일 간 과거사 갈등은 한 층 격화할 전망이다. 사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다큐 '어폴로지'에 담긴 김복동 할머니, 길원옥 할머니의 모습. [사진 영화사 그램]

오는 21일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 여부를 결정짓는 위안부 판결이 예고되며 국내에 반일(反日) 정서가 재점화할 우려가 커지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올 경우 가뜩이나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결정으로 들끓는 여론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될 수 있어서다. 이 경우 지난해 말부터 일본과의 대결 구도를 벗어나 한·일 관계 개선을 강조해 온 문재인 정부의 기조에도 급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크다.

日 "오염수 방류" 결정에 반일감정 꿈틀 #21일 위안부 판결, 암초 되나 #좌초 위기의 한·일 관계 복원 구상

이번 선고는 고(故) 김복동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와 유가족 2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한 결과이자 두 번째 위안부 판결에 해당한다. 앞서 지난 1월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인 고(故) 배춘희 할머니 등 12명이 제기한 소송에서 재판부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에게 1인당 1억원을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당초 이번 소송의 선고는 지난 1월로 예정됐지만 재판부가 추가 심리 필요성을 제기하며 세 달 가량 미뤄졌다.

21일 선고에서 또 다시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묻는 판결이 나온다면 한·일 과거사 갈등은 외교적으로는 해결 불가능한 수준으로 악화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 정부와 위안부 피해자 입장에선 일본 정부의 배상이 이뤄져야 최종적인 사법 정의를 실현할 수 있지만, 일본은 국내에서 진행되는 사법절차에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어 배상에 나설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선고에선 지난 1월 당시 재판부 판결과는 다른 판단이 나올 가능성도 제기된다. 당초 지난 1월 13일로 예정됐던 선고 기일을 미루고 변론을 재개하는 등 재판부가 또 다른 변수를 고려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서다.

전남 여수 어민 100여명은 지난 19일 어선 150여척을 동원해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에 반대하는 해상 퍼레이드를 전개했다.[뉴스1]

전남 여수 어민 100여명은 지난 19일 어선 150여척을 동원해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에 반대하는 해상 퍼레이드를 전개했다.[뉴스1]

한·일 갈등의 또 다른 축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역시 외교적 갈등을 넘어 반일 감정을 이끄는 사건으로 비화했다. 특히 해안가 어민들은 즉각 항의의 뜻을 밝히며 집단 행동에 나섰다. 여수수산인협회 등 전남 여수 어민들은 지난 19일 여수 바다에 150여척의 배를 띄워 시위에 나섰고, 거제어촌계장협의회 등 경남 거제시 어민 300여명은 이날 오염수 방류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엔 오염수 방류와 관련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 전 세계 인류에 대한 핵 공격과 다를 바 없는 파멸적 행위”라고 비판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와 관련 정의용 외교부장관은 20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현안 질의에서 “일본 정부의 (오염수 방류) 결정을 단호하게 반대한다”며 “일본의 결정에 대한 유일한 긍정적 반응은 미국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이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정한 기준과 규정을 지킨다면 현재로썬 오염수 방류를 저지할 뚜렷한 대책은 없는 상태다.

대화·협력 제스쳐 보냈지만 냉담한 日 

한국 봅슬레이 원윤종 선수와 북한 여자 아이스하키 황충금 선수를 기수로 한 남북한 선수단이 9일 한반도기를 흔들며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 입장하고 있다. 국제 대회 개회식에서 남북 선수단 공동입장은 2007년 창춘 겨울아시안게임 이후 11년 만이다.

한국 봅슬레이 원윤종 선수와 북한 여자 아이스하키 황충금 선수를 기수로 한 남북한 선수단이 9일 한반도기를 흔들며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 입장하고 있다. 국제 대회 개회식에서 남북 선수단 공동입장은 2007년 창춘 겨울아시안게임 이후 11년 만이다.

북한이 오는 7월 열리는 도쿄올림픽에 불참 선언한 것 역시 한·일 관계를 복원할 유인이 일부 증발했다는 점에서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당초 2018년 평창 겨울 올림픽에서 남북 선수단이 개회식에 공동으로 입장하고 단일팀을 구성한 모습을 도쿄올림픽에서 재연해 남북 관계 복원의 단초로 삼겠다는 ‘어게인(again) 평창’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선 북한 뿐 아니라 일본과도 충분한 사전 협의가 필요한 만큼 도쿄올림픽 자체가 한·일 관계를 개선할 추동력이 될 것이란 분석이 많았다. 하지만 이같은 구상마저도 무산될 가능성이 커지며 한·일 관계를 개선할 단초를 마련하는 것조차 녹록지 않은 상황이 됐다.

문 대통령은 지난 3.1절 기념사를 통해 “언제든 일본 정부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준비가 돼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일본 측은 과거사 문제로 촉발된 갈등 국면이 장기화하며 아무런 대화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정의용 장관이 취임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일본 측 카운터파트인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과 전화통화조차 이뤄지지 않았단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일본 입장에선 임기를 1년여 남긴 문재인 정부와 대화를 하거나 관계를 개선할 유인이 없어 사실상 이번 정부에서 한·일 관계의 극적인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우리가 먼저 과거사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선택지를 구상해 일본에 제안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대선을 1년 앞두고 국내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점에는 이조차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