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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공 장례 다음 날 아일랜드 신페인당 대표가 사과한 이유

중앙일보

입력

필립 공의 외삼촌인 루이 마운트배튼 경. 미국 ABC는 아일랜드 신페인당의 당수가 그의 암살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고 보도했다. [ABC 캡쳐]

필립 공의 외삼촌인 루이 마운트배튼 경. 미국 ABC는 아일랜드 신페인당의 당수가 그의 암살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고 보도했다. [ABC 캡쳐]

영국 필립 공의 장례식 다음 날인 지난 18일(현지시간), 아일랜드의 민족주의 강경파 정당으로 분류되는 신페인(Sinn Fein)의 당수 메리 루 맥도널드(52)가 고개를 숙였다. 사과의 대상은 필립 공의 외삼촌인 고(故) 루이 마운트배튼 경이었다. 비극적인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필립에게 사실상 아버지 역할을 해준 인물이다. 신페인당의 수장이 마운트배튼 경의 사망 40여 년 만에 공식 사과에 나선 건, 그가 아일랜드 공화국군(Irish Republican Army·IRA)의 폭탄 테러에 희생됐던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은 이날 “맥도널드가 한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마운트배튼 암살 사건에 대해 사과의 뜻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맥도널드는 “역사적으로 가슴 아픈 일”이라며 “다시는 이런 충격과 슬픔을 겪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일”이라고 말했다. 신페인당 지도자가 직접 사과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맥도널드의 전임이었던 게리 애덤스 의원은 앞서 “마운트배튼 경은 군대의 정당한 목표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마운트배튼 경에게 공식 사과한 메리 루 맥도널드 아일랜드 신페인당 대표. [신페인당 홈페이지]

마운트배튼 경에게 공식 사과한 메리 루 맥도널드 아일랜드 신페인당 대표. [신페인당 홈페이지]

‘북아일랜드 분쟁’서 비롯된 테러

루이 마운트배튼 경은 1900년 바텐베르크 공자인 아버지와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어 낸 빅토리아 여왕의 외증손자인 셈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특수부대 창설을 돕고, 인도의 마지막 총독을 지내는 등 영국군의 중추 역할을 맡았다.

19세기 영국의 전성기를 이끈 것으로 평가되는 빅토리아 여왕. 루이 마운트배튼 경은 빅토리아 여왕의 외증손자였다. 중앙포토

19세기 영국의 전성기를 이끈 것으로 평가되는 빅토리아 여왕. 루이 마운트배튼 경은 빅토리아 여왕의 외증손자였다. 중앙포토

왕족인 그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아야 했던 배경에는 70년대 벌어진 ‘북아일랜드 분쟁’이 있었다. 아일랜드는 본래 가톨릭 국가였는데, 영국이 식민 통치를 하면서 북아일랜드 지역에 영국인 청교도들이 대거 이주했다. 이 때문에 21년 아일랜드가 독립한 뒤에도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남았고, 이곳에 살던 아일랜드 출신 가톨릭교도들은 청교도 이주민에 비해 각종 차별을 당했다.

불만을 품은 이들이 시민권을 보장해달라며 시위를 이어가던 72년,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군이 시위대 중 14명을 총살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을 적으로 보는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퍼졌고, IRA를 중심으로 한 세력들은 무장 투쟁에 나섰다. 아일랜드 출신 록 그룹 U2가 83년 발표한 ‘선데이, 블러드선데이’엔 당시 상황을 비판하는 가사가 담기기도 했다.

영국 인디펜던트는 필립 공이 삼촌의 죽음 뒤 북아일랜드에서의 폭력이 멈추길 바랐다고 보도했다. [인디펜던트 캡쳐]

영국 인디펜던트는 필립 공이 삼촌의 죽음 뒤 북아일랜드에서의 폭력이 멈추길 바랐다고 보도했다. [인디펜던트 캡쳐]

마운트배튼이 사망한 건 79년이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IRA가 배에 설치한 폭탄이 터지면서 목숨을 잃었다. 이 사고로 어린 두 손자도 세상을 떠났다. NYT는“영국 왕실의 심장부와 가장 가까운 곳을 강타한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양국이 껄끄러운 관계를 지속하는 가운데, 신페인당은 98년이 돼서야 미국 중재로 무장 투쟁을 포기했다. 2010년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영국 총리는 피의 일요일 사건을 재조사한 결과 영국 정부에 책임이 있다고 공식 인정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신페인당 내부에선 마운트배튼 암살 사건을 정당화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필립 공의 멘토이자 아버지 역할  

루이 마운트배튼 경과 필립 공의 모습. NYT는 신페인당의 사과 소식을 다루며, 마운트배튼이 필립의 버팀목이었다고 전했다. [NYT 캡쳐]

루이 마운트배튼 경과 필립 공의 모습. NYT는 신페인당의 사과 소식을 다루며, 마운트배튼이 필립의 버팀목이었다고 전했다. [NYT 캡쳐]

루이 마운트배튼 경은 생전 조카 필립 공을 친아들처럼 아꼈다. 그가 불안정한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필립 공은 21년 그리스·덴마크 왕자 안드레아스와 바텐베르크 가문의 앨리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리스가 터키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군주제는 무너졌고, 일가는 그리스에서 쫓겨났다. 그의 어머니는 정신장애를 앓았고, 아버지는 평생 카지노를 전전했다고 한다. 심지어 누나인 세실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필립 공의 부모님 결혼 사진. BBC는 필립 공의 부모가 왕실에서 쫓겨난 뒤 파리 외곽에 정착했지만, 어머니가 정신병을 앓았다고 보도했다. [영국 BBC 캡쳐]

필립 공의 부모님 결혼 사진. BBC는 필립 공의 부모가 왕실에서 쫓겨난 뒤 파리 외곽에 정착했지만, 어머니가 정신병을 앓았다고 보도했다. [영국 BBC 캡쳐]

루이는 필립 공이 방황하지 않고 영국에 잘 정착하도록 도왔다. 영국 BBC에 따르면, 영국군 출신인 그는 필립 공에게 왕립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도록 조언했다. 훗날 해군사관학교에 시찰 나온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만나 결혼했으니 두 사람의 인연을 만들어준 셈이다. BBC는 “루이는 필립이 영국 왕실과 친해지도록 도왔다”며 “그는 필립이 결혼한 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도 친하게 지냈고, 부부의 장남인 찰스 왕세자의 멘토 역할도 했다”고 전했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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