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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플] “기계는 절대로 인간보다 좋은 번역할 수 없어”

중앙일보

입력 2021.04.1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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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투자자와 스타트업 창업자가 싸웠다. 주제는 ‘AI가 인간 번역을 대체할 수 있나’. 투자자는 ‘대체할 수 있다’고, 창업자는 ‘없다’고 했다. 언쟁 끝에 둘은 합의를 봤다. “기술이 대체할 수 없다. 그러나 기술에 저항하지 않고, 기술을 활용한다.” 투자사인 소프트뱅크벤처스는 240억원을 내놨다.

팩플레터 89호의 요약본
이현무 아이유노 대표 인터뷰

3년 뒤, 손정의 회장도 설득당했다. 소프트뱅크 비전펀드가 1800억원을 투자했다. 한국인이 창업한 세계 1위 콘텐트 현지화 기업, 아이유노 이야기다.

아이유노는 영화·드라마에 80개 언어로 자막·더빙을 입혀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동영상 서비스(OTT)나 방송사에 공급한다. 지난해 매출은 3억8400만 달러(약 4340억원).

비전펀드 투자가 공개된 지난 9일, 이현무(45) 아이유노 대표를 화상 인터뷰했다. 그는 “번역은 재창조고, 더빙은 연기”라며 “기술이 대체할 순 없지만, 기술을 도입하면 효율과 품질이 올라간다”고 했다.

아이유노 이현무 대표. 사진 아이유노

아이유노 이현무 대표. 사진 아이유노

NASA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던 연세대 토목공학과 졸업반 학생은 유학 자금이 필요했다. 비디오테이프를 앞뒤로 돌려보며 영화 자막 다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너무 원시적이다’ 싶어 사비로 TV카드를 사서 컴퓨터로 작업했더니 효율이 올랐다. 그러나 급여는 짰다. 동료 2명과 ‘우리 1년만 하다가 유학가자’고 2002년 창업했다.

한국 시장은 작았고, 방송사 거래는 불안정했다. 8년 사업에 남은 건 빚 10억원. 외할머니가 보증 서 주신 2억원을 들고 2011년 싱가포르로 가, 다국적 방송사를 공략했다. AI 음성인식과 클라우드 작업 같은 아이유노의 기술은 더 큰 시장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현재 34개국 67개 지사를 뒀고, 80개 이상의 언어를 처리한다. 본사는 런던.

‘콘텐트 현지화’가 뭔가.
“영상 콘텐트가 지역마다, 회사마다 맞춰야 할 문화적·기술적 요건이 제각각이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와 아마존, 페이스북이 원하는 파일 형식이 다르다. 우리는 각사·각국에서 바로 틀 수 있게 언어·문화·기술 사양을 맞춰 제공한다. 클라우드와 AI 기술 없이는 불가능하다.”
왜 클라우드인가  
“고객사의 수백 개 요구사항을 전통 번역 업체는 수년간 시행착오로 익히는데, 우리는 클라우드 시스템으로 모든 작업을 관리한다. 오탈자가 나오면 번역가의 창에 실시간으로 알림이 뜬다.”
성공 비결은.
“이 업계에서 정말 풀어야 하는 문제가 뭔지가 명확해지면 그 회사는 성공한다. 그 문제를 알아내는 데 10년 걸리더라. 글로벌 고객을 상대하면 이해가 더 깊어진다.”
어떤 문제를 발견해 풀고 있나
“노동집약적인 번역을 효율화하는 것. 그러면 인간의 창의성이 빛을 발할 수 있다. 우리는 아마존처럼 공급망을 구축하고, 기계가 인간을 돕게 한다. 단순 번역은 AI가 하고, 우리 작가와 성우들은 품질과 창의성에 집중한다.”

소프트뱅크 비전펀드의 투자는 이현무 대표가 손정의 회장에게 화상으로 회사 브리핑을 한 후 이뤄졌다. 문규학 소프트뱅크 비전펀드 매니징파트너는 “아이유노는 소규모 수작업으로 이뤄지던 미디어 현지화 작업을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산업화했다”며 “AI와 함께 더 성장할 시장”이라고 투자 이유를 밝혔다.

구글이나 아마존도 AI 번역을 하는데.
“그런 번역은 영상 자막에 못 쓴다. 거기는 뜻이 맞냐 틀리냐고, 우리는 자막으로 쓸 수 있냐 없냐다. 아이유노의 AI 번역은 입말에서 입말로 감정과 정서를 담는 특정한 데이터로 훈련된 번역이다.”

AI의 자리, 인간의 자리 

아이유노는 회사 소개에서 “2만 명의 언어 능력 집단(성우, 번역가)을 확보했다”고 적었다. 대부분 프리랜서다.

단가를 후려치는 건 아닌가.
“오히려 제값을 받게 된다. 업계에 없던 인증제도도 저희가 만들었다. 뛰어난 번역가와 성우를 선정하는 아이유노 어워드를 매년 열어 시상한다. 본인의 커리어에 도움 되니 좋아하신다.”
AI 기술은 번역업을 어떻게 바꾸나.
“예전에는 오탈자나 큰 오역 없이 안정적인 사람을 ‘번역 잘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오탈자는 기계가 찾는다. 이제는 창의성이다. 미국의 재밌는 유머를 한국에서 어떻게 구현하는가 하는.”
AI의 자리가 점점 커지지 않을까.
“기계는 절대로 인간보다 좋은 번역을 할 수 없다. 좋은 번역의 기준을 사람이 정하기 때문이다. 설명서 번역은 AI가 할 수 있지만, 미디어 번역은 의미가 아닌 정서를 전달해야 한다. AI가 우리의 가족사, 고뇌, 슬픔을 다 갖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이 AI 시대 일자리를 고민한다.
“막연한 두려움과 저항이 가장 위험하다. AI가 전혀 안 들어올 분야 찾다가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되어야 하나? 그 기술을 직접 체험하며 판단해도 늦지 않다.”

초 글로벌, 초 로컬 

아이유노는 넷플릭스의 우선 협력사 중 하나다. 넷플릭스는 190개국에서 서비스하는데 콘텐트의 63%는 비영어다. ‘초 글로벌 기업의 초 로컬화’인 셈.

대형 거래처는 어떻게 잡나
“해외 시장은 규격화돼 있고, 특히 IT 기반의 OTT 업체는 보안 같은 요구 사항이 세밀하다. 그걸 충족시키면 다른 고객도 모여든다.”
파트너로서 넷플릭스는 어떤가.
“넷플릭스 외에도 여러 OTT 고객사와 일한다. 대형 OTT는 저가 유통사보다 번역 단가를 3배 이상 준다. 번역이 좋으면 시청률이 높다는 게 확인되어서다. 우리는 내 업의 품질을 높일 수 있는 고객사를 선호한다.”
자국 문화 보호 측면에서, 글로벌 기업을 경계하기도 한다.
“분명한 건 OTT를 통해 타 언어권 콘텐트에 대한 수용성이 전 세계적으로 높아졌다는 것이다. 유럽과 미국 소비자들이 한국 콘텐트를 좋아하게 되는 게 나쁜 건 아니지 않나.”

한국인 창업자의 글로벌 진출 

아이유노는 최근 2년 새 현지 유명 업체들을 잇달아 합병했다. 2019년에는 유럽 1위 번역업체인 BTI스튜디오를, 올 1월에는 미국의 SDI미디어를 인수했다.

왜 자꾸 합병하나?
“규모의 경제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SDI는 할리우드 제작사와 관계가 단단하고, 아이유노는 젊은 조직문화와 기술 강점이 있다. 합병 후 글로벌 점유율은 15% 정도다.”
사람들은 쿠팡이 한국 기업인가 미국 기업인가 묻는다. 한국인이 창업해 런던에 본사를 두고 글로벌로 사업하는 아이유노는 뭐라고 불러야 하나.
“아이유노는 세계에서 가장 글로벌한 회사다. 경영진(C 레벨 임원들)이 한국인·영국인·미국인 각 3명씩으로 구성됐다. 주주도 스웨덴계와 미국계, 한국과 일본 자금이 들어와 있다. 이런 주주들이 있어야 고급 인재가 회사에 온다.”

심서현 기자 shsh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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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4월 15일 팩플 뉴스레터로 구독자들에게 발송된 '손정의 pick, 번역의 미래'의 요약 버전입니다. 팩플 뉴스레터 전문을 보고 싶으시면 이메일로 구독 신청하세요. 요즘 핫한 테크기업 소식을 입체적으로 뜯어보는 ‘기사 +α’가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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