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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발레…죽기 전에 한번은 꼭 날아오르리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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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드라마 ‘나빌레라’에서 발레 사제지간으로 만난 이채록 역의 송강과 심덕출 역의 박인환. [사진 tvN]

드라마 ‘나빌레라’에서 발레 사제지간으로 만난 이채록 역의 송강과 심덕출 역의 박인환. [사진 tvN]

“무용수가 되기에 너무 늦었다는 거 알고 있죠? 그런데 발레가 왜 하고 싶어요?”

웹툰 원작 tvN 드라마 ‘나빌레라’ #치매 앓는 일흔살의 발레 도전기 #“송강 보려 시청하다 박인환에 입덕” #내달엔 또다른 느낌 가무극 공연

“죽기 전에 나도 한 번은 날아오르고 싶어서.”

tvN 월화드라마 ‘나빌레라’에서 심덕출(박인환)과 이채록(송강)이 나누는 대화다. 얼핏 평범한 것 같지만 이들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평생 우편집배원으로 일하며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정작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흔살 노인과 이제야 하고 싶은 것을 찾았는데 번번이 눈앞에서 좌절을 맛보는 방황하는 스물셋 청춘의 진심이 담겨있는 탓이다. 덕출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은 안타까움을 더한다.

하지만 이들의 꿈이 모든 사람의 응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발레에 대한 편견, 성별과 연령에 대한 고정관념 등이 맞물려 괴롭힌다. 덕출이 아홉살 때는 아버지가 “남자가 무슨 발레냐”고 꾸짖었다면, 이제는 아내와 자식들이 “다 늦게 무슨 춤바람이냐. 차라리 등산을 하라”며 반대하는 식이다. 그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것은 되려 다른 길을 가본 사람들. 의사를 때려치우고 다큐멘터리 감독을 하겠다고 나선 막내아들이나 출산과 육아로 경력 단절을 경험한 며느리 등 원했던 무언가를 가슴에 품고 살았던 인물들은 “그저 발레가 좋다”는 그 마음에 공감한다.

다음 원작 웹툰(글 HUN·그림 지민)을 각색해 드라마로 만든 한동화 PD는 “웹툰을 읽고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그분들도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이었지만 가족을 위해 헌신하느라 이루지 못한 꿈이 있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고 했다. “생각과 행동이 늘 달랐고 부족했던” 자식 입장에서 “지금의 저보다 젊고 어려웠던 시절 4남매를 키우며 힘든 티 하나 내지 않는 고목처럼 살아온” 부모님을 위해 만든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자식들의 직업이나 관계 설정은 웹툰과 다소 달라졌지만 가부장적인 장남 등 각각의 캐릭터가 뚜렷해지면서 극의 전개도 한층 다이나믹해졌다.

원작 웹툰. [사진 카카오페이지]

원작 웹툰. [사진 카카오페이지]

과감한 캐스팅도 호평받는 부분. “송강 때문에 봤다가 박인환에 입덕했다”는 시청평이 줄을 이을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 30여년 만에 미니시리즈 주연을 맡은 박인환(76)은 “몸에 딱 달라붙는 발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내 나이가 되면 몸도 굳어서 운동하는 게 힘든데 덕출처럼 새롭게 도전하는 마음으로 임했다”고 말했다. 한 PD는 “배우의 주름 하나, 말 한마디로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과 관록을 전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 어린 배우를 캐스팅해 노인 분장을 하는 것은 지양했다”며 “‘국민 아빠’ 박인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아무런 이의 없이 모시게 됐다”고 밝혔다.

고령화 사회를 맞아 노년의 삶을 다룬 콘텐트가 늘어나면서 접근 방식도 달라졌다. 김혜자·고두심·나문희·윤여정·박원숙·김영옥 등 ‘시니어 어벤져스’가 총출동한 tvN ‘디어 마이 프렌즈’(2016) 이후 타임루프물과 결합한 JTBC ‘눈이 부시게’(2019) 등 소재와 장르도 다양해졌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과거 노년의 삶을 힘들고 고달프게 그린 경우가 많았다면 이제는 그 역시 삶의 일부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콘텐트가 많아졌다”고 분석했다. ‘나빌레라’의 박인환 역시 알츠하이머를 부정하거나 기이한 행동을 하기보다는 “끝까지 존엄성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다. 이어 “50~60대에 은퇴해도 바로 노인이 되지 않는 시대에 ‘낀 세대’를 다루는 작품도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웹툰 원작 드라마나 영화가 늘어나면서 소재가 다양화되는 것 역시 긍정적인 부분이다. 서울웹툰아카데미 박인하 이사장은 “2016년 연재를 시작한 ‘나빌레라’는 초반부터 평이 좋았던 작품”이라며 “노인과 발레라는 언밸런스한 상황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드라마를 끌어내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 HUN 작가의 장점”이라고 짚었다. HUN 작가 작품 중 앞서 영화화된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나 ‘해치지 않아’(2020)에서도 부족하고 어설픈 간첩이나 동물원으로 간 변호사 등 독특한 소재로 차별화를 꾀했다.

‘나빌레라’는 다음 달 14~30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무대에도 오른다. 2019년 초연 이후 2년 만에 재공연하는 창작가무극이다. 서울예술단 공연기획팀 관계자는 "요즘은 70대라 해도 덕출처럼 삶의 활력을 찾는 어르신들이 늘어나면서 재연에서는 주인공 연령을 일흔에서 76세로 올렸다”고 밝혔다. 100세 시대에 은퇴한 노년 세대, 마냥 미래를 꿈꿀 수 없는 20대 흙수저, 그사이에 끼어있는 386 기성세대의 이야기를 통해 세대 간 화해를 시도하겠다는 취지다. 채록 역을 맡은 아이돌 그룹 마이네임 출신 강인수를 제외하면 발레 전공자도 없다. 드라마와 가무극에 모두 참여한 유회웅 안무가는 "발레뿐 아니라 뮤지컬, 현대무용 등 다양한 춤을 접목해 판타지를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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