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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60대에 뭉친 쎄시봉 5명…‘방탄노인’ 탄생 뒤엔 두여인”

중앙일보

입력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8〉 다시 뭉친 ‘쎄시봉’ 친구들

2009년 MBC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에 출연한 쎄시봉 다섯 친구. 윗줄 왼쪽부터 조영남·최유라·윤형주·김세환. 아랫줄 왼쪽이 이장희, 오른쪽이 송창식. [사진 조영남]

2009년 MBC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에 출연한 쎄시봉 다섯 친구. 윗줄 왼쪽부터 조영남·최유라·윤형주·김세환. 아랫줄 왼쪽이 이장희, 오른쪽이 송창식. [사진 조영남]

쎄시봉이 왜 쎄시봉이 되었던가. 그건 참 우습게도 똑똑한 내 여사친(여자 사람 친구)의 한마디에서 비롯된다.

“아저씨, 친구들 불러모으면 어때?” #2009년 라디오 공동MC 최유라 제안 #송창식·윤형주·김세환·이장희 초청 #연습 없이 2시간 특집쇼, 삼탕 대박 #이듬해 TV 특집방송도 인기 끌어 #‘외계인’ 이장희는 출연 꺼려 빠져

그때 나는 이미 10년 가까이 MBC 라디오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라는 방송국 대표 프로그램에 지금은 TV 홈쇼핑 계에서 여왕 노릇을 하는 최유라와 함께 메인 MC를 맡고 있었다.

추석이 다가오자 우리는 매년 하던 대로 특집 프로를 준비할 때였다. 옆에 있던 유라가 혼잣말처럼 꿍얼댔다.

“아저씨! 이번에 아저씨 친구들 한 번 불러모으는 게 어때?”

이 짧은 한마디가 우리들 다섯 명, 송창식·윤형주·이장희·김세환 그리고 조영남 말년의 인생을 뒤바꿔 놓을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나는 그냥 편안한 DKNY(독거노인)로 ‘지금은 라디오 시대’의 MC를 맡아 안락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 그럼 연락 한 번 해볼까?”

나는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했다. 누구한테 전화하는 짓 말이다. 그것은 내 쪽에서 부탁 조의 전화. 내 기억에 그때까지 몇 년이고 난 전화를 안 했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면서 지내는 식이었다. 내 생각엔 기계 혐오증 비슷한 현상일 것이다. 전화기 자체도 구식이고 컴퓨터니 SNS니 하는 건 무슨 소린지조차 몰랐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웃겼다. 연락하는 족족 OK인 것이다. 내가 유라와 방송작가들한테 약간 우쭐할 수 있었던 건 녀석들 모두가 “형이 원한다면”이라는 짧은 단서였다.

이장희, 서울 올 때마다 거나한 만찬  

나 혼자 생각은 내가 형인 건 맞는데 내가 형 노릇을 해본 적은 전혀 없었다.

사실상 형 노릇은 장희가 다 했다. 장희가 미국 땅 LA에서 ‘라디오코리아’ 한인 방송으로 크게 성공하는 바람에 수년에 걸쳐 한 번씩 서울에 건너올 때마다 우리 쎄시봉 친구들을 소집, 저녁 만찬을 거나하게 냈으니 말이다.

거나하단 표현은 내가 소박한 표현을 쓴 것이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도시 서울에서의 최고급 파티였기 때문이다. 신라호텔 중식당, 거기다 독방에 가서 최고급 코스로 나오는 방식이니.

참석 멤버 또한 장희다웠다. 일단 우리 다섯 명, 송창식·윤형주·김세환·조영남, 그리고 본인 이장희, 거기에 ‘아침이슬’을 만들어 부른 김민기, 홍대미대 학장이었던 이두식, 말없이 노래만 할 줄 알았던 조동진, 사진장이 김중만, 기타리스트 강근식, 싱겁 떠는 개그맨 전유성, 여기다 소설가 최인호, 똘강 이백천 선생, 쎄시봉 시절 우리의 영혼을 책임지셨던 김성수 신부(후에 성공회대 총장과 성공회 대주교가 되심), 이런 식으로 모였으니까 우리가 그때 정치에 뜻이 있었다면 원내 구성은 가능했었다.

생각해 보시라. 이런 인원이 서울서 제일 비싼 음식을 주문해서 때려먹었으니 얼마의 돈이 나왔겠는가. 형이랍시고 매번 얻어먹는 게 미안해 나도 한 번 냈다가 식겁한 적이 있다. 400만원 이상이 나왔으니 말이다. 장희 녀석은 와인 없인 저녁을 못 먹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이런 와중에 내가 최유라의 말을 듣고(여자 말 잘 들으면 손해나는 일은 없다. 맞는 말이다) 전화를 했더니 “형이 부르면”, 해서 MBC 2009년 10월 3일(윤형주의 기록상) ‘라디오 추석 특집쇼’에 한 놈, 두 놈 통기타 하나씩을 끼고 드디어 송창식까지 다섯 명이 몽땅 모인 것이다. 몽땅이란 얘기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세상에 이 일을 누가 믿겠는가. 우리는 이날 이때까지 다섯 명이 모여 함께 노랠 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몇 년 전 미국 LA에서 현지 교민 위문공연 때 처음으로 다섯 명이 나란히 서서 노래하는 줄 알았는데 글쎄 앞 순서에 나간 이장희가 그 유명한 슈라인 오디토리움(가끔 아카데미 시상식도 열렸던 5000석짜리 대형극장) 앞에 서서 기타를 들고 “나 그대에게”까지 부르고 중단, 다시 “나 그대에게”, 자기가 작사 작곡한 노래인데 그걸 앞부분만 세 번 부르고 그냥 무대 뒤로 퇴장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장희가 너무 오랜만에 노래를 해서 고국에 있는 여자를 생각하느라 심정이 격해서 노래를 차마 이어갈 수가 없는 줄 알았는데 쇼가 다 끝나고 세환이가 “형! 왜 노래를 안 한 거야?” 하고 물으니까 장희 왈 “야 시캬 그다음 가사가 생각나질 않는 거야” 하는 바람에 최초일 수 있었던 다섯 명의 공연은 물 건너가고 이제야 60 노인이 되어서 함께 노랠 부를 수 있게 된 거다. 말이 60 노인이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창식이의 모양새는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왔니”, “엉 나 왔어”, “뭐하지?” “,  별 것 아냐”. 만나서 어수선하게 인사를 나누다가 세환인가가 "우리 노래 하려면 한 번 연습이라도… ,” 이때 "야! 연습은 쥐뿔! 무슨 연습이야.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지. 야! 형주야! 니가 두 시간짜리 순서 대충 적어놔봐. 그냥 그대로 하면 될 거야” 이렇게 됐다.

나는 뭘 꼭 하는 것 같은 느낌이 싫었다. 사실 우린 며칠 전쯤 만나 연습을 했어야 옳다. 그러나 연습을 하다 보면 몇 년 만에 처음 보는 설렘, 긴박감 같은 느낌을 포기하고 연습한 대로 해야 하는 기계식 마음으로 변질될 수가 있다. 똘강 선생의 지침대로 너무 잘하려고 욕심내지 않고(연습 없이 하는 게 이에 해당한다) 평소 하던 대로 하자는 게 내 견해였다. 내 아버지 조승초씨의 "놀멘 놀멘 하라우” 식인 것이다.

드디어 저녁 8시경 놀음이 시작되었다. 최유라를 비롯, 이종환 형이나 배철수, PD, 방송작가들도 상노인네들이 연습 없이 뭘 어쩔까 심히 걱정했을 것이다.

드디어 최유라가 낭랑한 목소리로 시작 멘트를 했고, 우린 그냥 하던 대로 2시간 넘게 논스톱으로 라디오쇼를 끌고 나갔다. 그리고 며칠 후에 방송된다는 얘기만 듣고 모두 헤어졌다.

방송이 나간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걸 챙겨보는 성격이 아니다. 와! 그런데 특집방송의 여파가 이렇게 클 수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울면서 들었다는 청취자가 많았는데 난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가 울게 만든 구석이 없는데 어느 대목에서 울었는지가 궁금했다. 그뿐이 아니라 그 ‘추석 특집쇼 조영남과 친구들’을 재방송까지 했다는 것이다. 라디오 MC 경험에 실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얼씨구! 또 삼탕 재방까지 했다고 들었다.

그냥 한 번 해본 라디오 특집 방송 하나로 누가 봐도 환한 TV 시대에 라디오 스타 역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그리고 그다음 해 2010 TV로 옮긴 특집 ‘쎄시봉 친구들’이 방송되면서 우리 4명은 라디오 스타에서 TV 스타로 올라선다. TV에서 불을 지핀 건 친하게 지냈던 김명정 TV 구성작가에 의해서였다. 그러니까 라디오 쇼에선 최유라가 시동을 걸었고, TV에서 김명정이가 최유라 역할을 맡았던 거다. 나는 참 여복이 많은 편이다. 여기서 내가 후배 가수들에게 팁을 하나 준다면 그건 평소에 방송작가와 친해 두라는 것이다. PD,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TV의 경우 방송작가의 파워가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미 성공한 라디오 특집과 이번 TV 특집 사이에는 절대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건 이장희의 불참이다. 지난번 라디오 때도 나는 사실상 이장희를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마침 서울에 와 있던 장희가 "라디오쇼? 알았어. 형!” 했다. 그건 자신이 십수 년 미국에서 라디오코리아로 성공했기 때문에 라디오의 특징, 얼굴 안 비치고 무한 편집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선선히 나왔던 것이다. TV 쇼 때는 이장희가 미국에 들어가 있을 때였기 때문에 아주 스무스하게 나머지 4명 송창식·윤형주·김세환·조영남만으로 커버해야 했다. 이때도 내 기억엔 연습을 날 잡아 한 것 같지는 않다.

촬영이 자연스럽게 길어져서 1부, 2부로 늘렸다는 얘기도 들었다.

방송이 나갔는데 대박이었다. 어쩜 자연스러운 결말이었다. 라디오에서 성공한 쇼를 TV에 옮겨온다고 성공한다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다. 그러나 참 희한하게 TV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왜 사람들이 옛날 옛적의 팝송 나부랭이들을 그토록 좋아할까. 우리는 드디어 라디오 스타에서 TV 스타로 올라섰다. 사람들은 60 초중반의 노인들을 아이돌이나 방탄소년단쯤으로 좋아해 줬다. 우리는 한 마디로 방탄노인(?)들이었다.

2011년 TV 방송엔 이장희 설득해 동참

2011년 MBC 설 특집 방송에 출연한 쎄시봉 멤버들. [사진 조영남]

2011년 MBC 설 특집 방송에 출연한 쎄시봉 멤버들. [사진 조영남]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방송은 우리를 가만 놔두질 않았다.

그다음 해 2011년 ‘MBC 설 특집’을 찍자는 것이었다. 이번엔 쇼를 더 새롭게 만들기 위해 이장희까지 부르자는 것이었다. 참 난감했다. 형주나 세환이나 나는 그래도 정상인에 가깝다. 그러나 송창식이나 이장희는 다르다. 얘네들은 외계인이다. 얘네들은 한 번 안 한다 하면 그게 끝이다. 이런 얘기는 나처럼 함께 살아보지 않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장희는 다시는 TV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선언을 해온 터였다. 작가 김명정이나 PD 신정수도 알 수가 없다. 막무가내로 이장희가 합세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 김명정이도 PD 신정수도 윤형주도 못하는 일이다. 나밖엔 없다.

나는 장거리 전화로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장희와의 통화는 늘 십여초 만에 끝나곤 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다르다. 나는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하며 차근차근 "야! 장희야. 니가 울릉도에 니 몸을 묻는다는 거 다 알구 있어. 자! 그런데 장희야, 니가 어차피 울릉도에서 말년을 보내는 데 있어서 아무도 모르는 무명으로 보내는 게 효과적이겠냐 아니면 유명인으로 말년을 보내는 게 효과적이겠냐”, 교묘한 질문으로 나는 이장희를 TV에 등장시키는 데 성공을 거둔 것이다. 장희는 나한테 화답이라도 하려는 듯 귀국하는 비행기 속에서 우리 4명에게 보내는 정이 그득 담긴 편지를 써와 녹화하던 TV 쇼에서 공개하므로 또 대박을 치게 된 것이다.

TV 조선에서 미스트롯을 해 성공을 거두자 미스터트롯도 성공이어서 미스트롯 2를 제작, 지루해하지 않을까 하는 기우를 일거에 제압, TV 쇼의 끝판왕을 만들어낸 것과 매우 흡사했다.

함박눈이 내리던 겨울 긴 밤, 새벽까지 우리는 유재석과 김원희의 ‘2011년 신년 특집 놀러와’를 찍느라 기진맥진했다.

쎄시봉이 쎄시봉으로 완성된 것은 두 명의 여사친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은 아주 작은 생각에서 비롯된 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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