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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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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현예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김현예 P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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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행위인데 표정의 차이로 의미가 달라지는 언어가 있다. 수어(手語)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손가락을 들어 관자놀이에 대면 ‘생각하다’. 반면 손가락을 들어 관자놀이에 대며 눈을 동그랗게 뜨면, 전혀 다른 의미인 ‘왜’가 된다. 수어는 보이는 언어(sign language)인 탓에 미묘한 표정의 가감으로 의미가 확 변한다.

한국어와 함께 법적으로 인정받은 우리나라의 공용어가 수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난 2016년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되면서 수어는 한국어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그 덕에 수어통역은 TV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 됐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 브리핑엔 어김없이 분주히 양손과 표정을 사용해 수어통역을 해주는 통역사가 등장한다. 서울시가 매일 진행하는 코로나19 브리핑장에도 수어통역사가 함께 한다. 농인(聾人)을 위한 통역이다.

그런데 최근 이 통역이 무용지물이 된 사건이 벌어졌다. 지난 4·7 보궐선거다. TV토론 중계에 등장한 통역인은 단 한 명. 후보 2명이 토론을 하게 되면 2명의 수어통역사가 등장해 각 후보자의 공약을 통역해야 했지만, 실제론 한 명의 수어통역사가 후보 2명의 말을 끊임없이 전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누구 얘긴지 모르겠다’는 농인들의 반응이 쏟아졌다. 참다못한 농인과 시민단체들은 지난 14일 결국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았다.

장벽은 곳곳에 있다. 커피숍·음식점에서 방문기록인 ‘QR코드 인증’을 하는 것도 농인들에겐 쉽지 않다. 재난지원금 신청, 자가격리, 코로나19 백신을 맞는 경우에도 이들에겐 통역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통역사는 늘 부족하다. 강남구에 따르면 서울 25개 구청에서 활동하는 수어통역사는 100명을 겨우 웃돈다. 최근엔 서울시가 코로나 발생 1년 만에 선별진료소에 영상통화로 수어통역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장비 보급에 나섰지만, 백신접종센터에서 수어통역을 제공하는 곳은 많지 않다. 그뿐만 아니다. 전국 대형병원 가운데 수어통역사를 둔 곳도 한두 손가락을 꼽는다. 농인들에겐 진료 장벽마저 높은 셈이다. 올해로 17년 경력의 한 수어통역사는 이렇게 말했다. “수어는 사람이 마주 봐야 할 수 있는 배려의 언어입니다. 생명의 존엄성을 생각하면 의료현장의 수어통역은 꼭 필요하지 않을까요?”

김현예 P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