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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필버그도 속인 73조 사기꾼…두 아들 앞세운 비극적 최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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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사상 최악의 '폰지 사기'를 저지른 버나드 메이도프가 교도소 복역 중 사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사상 최악의 '폰지 사기'를 저지른 버나드 메이도프가 교도소 복역 중 사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배우 존 말코비치, 노벨평화상 수상자 엘리 비젤, 메이저리그의 전설 샌디 쿠팩스.

거물로 꼽히는 이들의 공통점은 사기 피해자였다는 것이다. 역사상 최악의 피라미드 금융사기(폰지 사기) 행각을 벌인 버나드 메이도프에게 다들 속아 넘어갔다. 메이도프의 사기 사건 금액은 73조원에 달했다. 간 큰 사기 행각을 벌인 그는 14일(현지시간) 사망했다.

AP통신 등은 이날 “15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메이도프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버트너 교도소의 의료시설에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82세.

거장부터 농부까지 수 만명 피해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엘리 비젤 교수 역시 메이도프 사기 사건의 피해자였다. 중앙포토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엘리 비젤 교수 역시 메이도프 사기 사건의 피해자였다. 중앙포토

우리는 그를 신으로 생각했어요. 그의 손에 있는 모든 것을 믿었습니다.

메이도프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 뒤인 200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홀로코스트 문학의 대가였던 엘리 비젤이 한 말이다. 비젤을 포함해 피해자들은 원금의 3~10% 수준의 수익을 보장한다는 메이도프의 말을 믿었다. 실제로 이자와 배당금이 꾸준히 들어왔다. 광고 한 번 없이 입소문만으로 메이도프의 명성은 높아졌고, 투자자들은 몰렸다.

하지만 실제로 메이도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신규 투자자로부터 돈을 받아 기존 투자자에게 수익금을 지급했을 뿐이었다. 1920년대 미국 찰스 폰지가 저질러 그의 이름에서 따온 ‘폰지 사기’의 전형이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70년대 뉴욕 맨해튼 일대 지인을 상대로 시작된 사기는 2000년대엔 세계적인 헤지펀드사와 미국 명문 대학으로까지 퍼졌다. 나중엔 가난한 농부나 수리공도 그에게 돈을 맡겼다.

사기 행각이 드러난 뒤 2009년 법원을 나서는 버나드 메이도프의 모습. AP=연합뉴스

사기 행각이 드러난 뒤 2009년 법원을 나서는 버나드 메이도프의 모습. AP=연합뉴스

사기 전말이 드러난 건 2007~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다. 현금이 필요해진 투자자들은 원금 상환을 요구했다. 이를 감당할 수 없었던 메이도프는 결국 두 아들에게 사실을 털어놨고, 아들들은 미 연방수사국(FBI)에 신고했다. 미 CNBC는 이 사기로 전 세계 136개국에서 3만7000여명이 피해를 봤고 보도했다. 피해액은 모두 650억달러(약 72조 70000억원)에 달했다. 영국 가디언은 “메이도프가 매달 원하는 수익률을 임의로 정하고 그 수치에 맞춰 주식을 사고판 것처럼 꾸민 것으로 조사됐다”고 전했다. 결국 그는 2009년 징역 150년형을 선고받았다.

사기 비결은 ‘자수성가 유대인’ 이미지

메이도프가 수 십년간 사기를 저지를 수 있던 건 ‘자수성가한 유대인’ 이미지 덕분이었다. 그는 38년 유대인이자 동유럽 출신 이민자의 자녀였던 부모 아래서 태어났다. 아버지 랄프 메이도프는 스포츠용품 사업을 운영하다가 실패하자 주식 투자에 뛰어들었다. 가디언에 따르면 그는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규제로 주식 사업을 제지당한 뒤에도 주식 브로커로 일했다.

영화계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도 버나드 메이도프에게 투자했다가 피해를 봤다. AP=연합뉴스

영화계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도 버나드 메이도프에게 투자했다가 피해를 봤다. AP=연합뉴스

아버지를 보고 자라며 주식에 관심이 많았던 메이도프는 20대 초반 자신의 이름을 딴 투자증권회사를 차렸다. 여름철 인명 구조나 잔디 스프링클러 설치 등을 해 번 돈 5000달러(약 560만원)를 밑천 삼았다.

첫 타깃 고객은 자신과 같은 유대계 사람들이었다. 은퇴한 회계사였던 장인으로부터 투자자를 소개받기도 했다. 경제난에도 꾸준히 수익을 내는 것처럼 보이면서 메이도프는 어느새 유대인의 롤모델이 돼 있었다. 나스닥 증권거래소 위원장, 전미증권딜러협회(현 FINRA) 이사 등을 지내며 월가(街)에서 영향력도 커졌다.

NYT는 메이도프 가족의 화려한 삶 역시 투자자를 모으는 데 한몫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맨해튼에 펜트하우스를 보유하고, 롱 아일랜드의 해변 별장, 팜 비치의 빈티지 저택 등도 갖고 있었다. 이외에 남프랑스와 지중해 인근에도 아파트를 사두고, 대형 파워 보트와 제트기를 탔다.

감옥서 두 아들 죽음 들어야 했던 비극도

메이도프는 말기 신장병 등을 이유로 석방을 요청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로이터=연합뉴스

메이도프는 말기 신장병 등을 이유로 석방을 요청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로이터=연합뉴스

영국 BBC는 지난해 2월 메이도프가 신장병 등 만성 질환을 이유로 석방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11년을 복역하는 동안 고통을 많이 받았다”며 죽음만큼은 교도소 밖에서 맞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법원은 피해자들이 여전히 힘들게 지내고 있는 점 등을 들어 기각했다.

그는 두 아들의 사망 소식도 교도소에서 들어야 했다. 메이도프의 가족에 대한 수사와 소송이 이어지던 2010년, 장남 마크는 맨해튼의 한 아파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 다른 아들 앤드루는 2003년 완치 판정을 받았던 암이 재발해 2014년 48세 나이로 사망했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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