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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형님이라 부른 나무꾼 집에 가 형님 노릇한 호랑이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옛이야기(58)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바야흐로 꽃대궐의 시절에 제목마저 그냥 ‘꽃’인 이 시를 떠올려본다.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고, 좋지 않은 기억력에도 이 두 연 정도는 읊고 다니다 보니 이 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한때는 ‘이거, 좀 폭력적인 거 아냐?’ 라고 생각했다. 타인이 나에게 이름을 붙여주면 나는 그냥 그 이름대로의 존재가 되어 버리는 건가 싶었다. 삐딱하게 보다 보니 타인에 대해 함부로 규정하는 태도, 낙인 찍기에까지 생각이 미치기도 했다.

어느 날 문득, 이 시의 전문을 다 본 적이 있나? 싶은 새삼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저 두 연으로만 이루어진 시는 아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것도 있지만, 누군가 내게도 나의 빛깔과 향기에 걸맞는 이름을 불러주길 원한다는 내용이다.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라는 것은 그가 내게 붙여주는 이름대로 나를 그 안에 쑤셔 넣고 수동적인 태도로 내 정체성을 규정당하는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안고 살아간다.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 나의 빛깔과 향기를 알아차려 주어야 한다. 각자의 고유한 빛깔과 향기가 서로 어우러질 때 너도나도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라일락이 한창 피었다. 꽃말이 ‘첫사랑, 젊은 날의 추억’이라는데, 어떤 기억은 추억이 될 수도 있는 것은 내가 그 일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소환했기 때문이다. [사진 pixabay]

라일락이 한창 피었다. 꽃말이 ‘첫사랑, 젊은 날의 추억’이라는데, 어떤 기억은 추억이 될 수도 있는 것은 내가 그 일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소환했기 때문이다. [사진 pixabay]

이 시를 다시 음미해 보았던 것은 좀 뜬금없이 보일지 모르겠으나, ‘효자가 된 호랑이 형님’에 대해 토론하던 와중에 떠오른 생각 때문이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가난한 나무꾼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별안간 커다란 호랑이와 마주쳤다. ‘이제 꼼짝없이 죽었다’ 싶었던 나무꾼은 일단 호랑이 앞에 납작 엎드리고는 “아이고 형님!” 하며 울부짖었다. 나무꾼을 잡아먹으려 달려들던 호랑이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네 형님이냐? 왜 날 보고는 그리 우는 거냐” 호통을 쳤다. 나무꾼은 구구절절 애절한 사연을 늘어놓았다. “우리 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제 위에 형님이 있었다는데, 낳고 보니 호랑이가 되어서 산으로 갔답니다. 그 후로는 여지껏 소식이 불통이니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하시며 만날 밤이나 낮이나 그렇게 맏아들 생각하며 울음으로 세상을 지내십니다. 그런데 당신을 보니 내 형님 같은데, 차마 형님이란 말을 못하고 이렇게 앉아 울 수밖에 없습니다.”

호부호형을 못하는 홍길동 심정도 이랬을까. 서럽게 땅을 치고 울며 이렇게 애타게 형님을 부르는 나무꾼을 보고 호랑이도 생각해 보니, 자기를 낳아준 이가 누군지도 모르고 평생 살아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도 있고 동생도 있고, 그 어머니가 자기를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고 하니 호랑이는 이 나무꾼을 잡아먹을 수가 없었다.

호랑이는 나뭇짐을 해다 주면서 어머니에게 가서 자기를 만난 일을 말씀드리고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였다. 그 다음날엔 급기야 어머니를 뵈어야겠다며 밤에 나무꾼의 집에 찾아왔다. 어머니는 커다란 호랑이를 막상 마주 대하고 보니 손발이 덜덜 떨릴 정도로 겁이 났지만, 나무꾼이 미리 알려준 대로, “아이고, 내 아들아. 어디 갔다 이제야 왔느냐. 네 동생이 이렇게 크도록 안 보이다가 이제야 어미라고 찾아왔느냐” 하고 울부짖으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제 틀림없이 내 가족을 찾았다 싶은 호랑이는 그날부터 밤마다 나무꾼 집에 고기를 갖다 주고 동생 장가들인다고 처녀를 잡아다 주고 하였다. 그 덕에 나무꾼 집안은 형편이 펴서 호랑이 만나 잘된 집안이라는 소문이 퍼질 정도였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호랑이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날 저녁 산의 호랑이들이 전부 굴건제복을 하고 짐승 한 마리씩을 짊어지고 마을에 왔다. 호랑이들이 가지고 온 짐승으로 저녁을 해 먹다 보니 처음에는 서로 갈라서 있던 호랑이와 사람들이 나중에는 뒤섞여서 함께 놀았다. 호랑이는 시묘살이까지 다 끝마친 후 마침내 자신도 기력이 쇠진하여 어머니 옆에 함께 묻혔다. 나무꾼 아들 둘이 모두 급제하여 그 후로도 잘 먹고 잘살았다.

나무꾼의 재치 있는 임기응변이었을까, 종종 바보처럼 당하기만 하는 어수룩한 호랑이들처럼 이 이야기의 호랑이도 바보같이 이용당한 것이었을까. 그런 게 아니라면 우리는 이 호랑이에게서 관계 맺음에 대한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을까.

“내가 호랑이를 형님으로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형님이 되었다.”

호랑이는 가끔 사육사를 해치기도 하는 맹수지만, 어떤 특별한 관계는 서로 의지하고 기억하는 존재로 맺어지기도 한다. [사진 wikimedia commons]

호랑이는 가끔 사육사를 해치기도 하는 맹수지만, 어떤 특별한 관계는 서로 의지하고 기억하는 존재로 맺어지기도 한다. [사진 wikimedia commons]

나무꾼이 자신을 형님이라고 불러주었을 때 “아이고, 내 아들아, 이제야 왔느냐” 하며 어머니가 눈물로 반겨주었을 때 호랑이는 비로소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게 되었다. 산에서 홀로 지내며 종종 나무꾼이나 잡아먹고 하던 삶 속에서도 호랑이는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자신에게도 어미가 있다는 것, 자신을 낳아준 이가 누군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존재의 근본을 알아차리는 꽤 중차대한 일이 된다.

우리 삶의 허무함은 종종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나도 모르겠다”라거나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발화되곤 한다. 이런저런 관계에 얽혀 제법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누구에게도 완전하게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에 끝도 없이 외로워지기도 한다. 복잡한 관계 속에서 여러 호칭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대로 내 본질은 아니다. 내 빛깔과 향기가 어떤 것인지 사실 나조차도 명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그렇게도 사주 관상을 보고, MBTI 성격유형 테스트를 하고, 타로점을 보고 이런저런 궁리 속에 떠돌아다닌다.

산속 호랑이가 ‘형님’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인 것은 그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무엇이 되고 싶다. 잊히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어서 누군가 내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을 불러주길 원하고, 그렇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기꺼이 그에게 다가가 그의 꽃이 되어 줄 수 있는 것이다.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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