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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인도주의 활동가들이 북한을 떠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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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준모 컨선월드와이드(국제 인도주의 단체) 한국 대표

이준모 컨선월드와이드(국제 인도주의 단체) 한국 대표

북한에 남아있던 유엔 세계식량계획(WFP) 사무소장과 직원, 그리고 아일랜드에 본부를 둔 국제 인도주의 단체 ‘컨선월드와이드’(이하 컨선) 사무소장이 지난 3월 18일 인도주의 활동가로는 마지막으로 북한에서 나왔다. 이제 북한에는 인도적 지원을 해왔던 외국인이 없다. 기다렸다는 듯이 북한에 더는 희망이 없고, 앞으로 더욱 고립될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송금 막은 미국의 제재가 결정타 #코로나19로 당분간 숨고르기할듯

하지만 컨선은 북한을 떠나지 않았다. 1998년부터 북한에서 활동해 온 컨선은 유엔 대북 제재 상황에서도 사업을 수행해 왔다. 유엔과 미국의 제재가 정점일 때에도 컨선은 현지 주민들의 식수 위생 장비가 필수적임을 설득해 제재 예외 승인을 받았다. 2019년에는 트랙터도 반입했다.

컨선이 북한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수혜 대상자와 사업 목표가 명확했고, 모니터링을 통한 사업 평가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유엔의 대북 제재는 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한 인도주의 사업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이 기본 취지이며, 우리는 줄곧 이를 견지했다.

제재 때문이 아니라면 왜 북한에서 나와야 했나. 그동안 유엔의 대북 제재와 더불어 미국의 독자 제재로 인해 해외 송금이 막혀 있었다. 일각에서 유엔의 제재보다 미국의 제재가 더 강력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로 인해 인도주의 사업비 집행과 직원 급여를 주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북한 거주 외국인들이 가장 힘들어한 것은 국경 봉쇄였다. 물리적인 국경 폐쇄로 누구도 북한에 입국할 수 없었고 한번 나가면 재입국이 허용되지 않았다. 자연히 인력 교체, 휴가, 해외 출장이 어려워졌고 북한에서 사기 어려운 약품과 필수품이 천천히 소진됐다.

코로나19를 차단하고자 했던 북한의 국경 봉쇄는 외국인들이 못 버티고 나가게 된 이유가 됐다. 북한이 외국인들을 강제로 추방한 것이 아니라, 상주하던 각 국가와 단체의 현지 사무소가 자체 판단한 이동이었다.

그래도 인도적 지원은 진행되고 있다. 컨선은 북한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우리는 올해 사업을 실행 중이며, 새로운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현지 주민 중심의 ‘자조적 접근’을 채택해 마을 공동체 스스로 자급과 발전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숙련된 현지 직원과 구축된 시스템 덕분에 국경 밖에서 원격으로도 사업을 이어갈 수 있다. 지금 북한에 식량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의약품이다. 중증환자를 입원시킬 수 있는 병동과 장비가 부족한 것은 물론, 전체 인구의 40%가 영양결핍으로 면역력이 떨어져 전염병에 극히 취약하다. 코로나19 사태 초기에 중국과 한국 사이에 있는 북한이 국경을 폐쇄한 것은 어찌 보면 보건 시스템이 열악한 국가로서는 당연한 조치였다.

공여 국가의 인도적 지원 의지는 북한 정권의 대외적인 태도로 인해 약화할 때가 많았다. 대북 인도적 지원의 주축이었던 유럽 국가들조차 북한의 폐쇄적 정책과 소통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 출국으로 인해 대북 인도적 지원의 마지막 끈마저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2030년까지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국제사회의 약속,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에서 북한도 예외는 아니다. 그동안 컨선이 지원한 사람들은 기초 서비스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계층과 난민들이었다. 그중 대부분이 여성 가장과 아이들이다. 우리의 활동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들을 향하고 있다. 또한 그것이 컨선과 유엔 기관으로 구성된 ‘북한인도주의팀’이 마지막까지 평양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다. 긴 호흡을 위해 잠시 숨을 들이마셨을 뿐 우리는 북한을 떠나지 않았다.

이준모 컨선월드와이드(국제 인도주의 단체) 한국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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