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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피의사실 공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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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진석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담당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받은 것처럼 알려진 걸 가장 억울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2009년 5월 ‘그 사건’ 직후 묘한 지방발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극단적 선택으로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전직 대통령의 최대 여한(餘恨)이 이른바 ‘논두렁 시계’ 수수 혐의였다는 내용이었다. 기업인으로부터 선물 받았다가 검찰 수사 개시 이후 사저 근처에 버린 것으로 알려진 1억 원짜리 명품 시계 한 쌍 말이다. 묘했다는 건 보도 내용이 기자의 지식과 달라서다.

그 대통령은 검찰에서 “(시계를)아내가 버렸다고 한다. 어디에 버렸는지는 아내에게 물어보겠다”고 진술했다. 수사 관계자가 기자들에게 그 진술 내용을 설명하던 장면도 또렷이 기억난다. 기억 앞에 겸손하기 위해 들춰본 옛 기사들에서도 해당 진술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내다 버린’ 억대 시계들은 ‘찢어버린’ 딸의 맨해튼 주택 구매 계약서와 함께 대통령과 그 가족에 대한 대표적 비판 근거가 됐다. 그런데 ‘그 사태’가 터지면서 ‘논두렁 시계’는 단숨에 ‘피의사실 공표’의 이음동의어로 전락했다.

그 대통령측 정치 세력은 그때부터 불리한 수사 기사가 나올 때마다 그 시계를 끄집어냈다. 사실관계에 대한 언급 없이 피의사실 공표의 폐해만을 강조하면서다. 어쩌면 당시의 묘한 보도들은 그런 전략의 시발점이었을 수도 있다. 전략은 먹혀들었다. 역풍을 우려한 반대 세력의 침묵 속에서 시계를 둘러싼 ‘팩트’는 빛이 바래졌고, 시계 자체를 조작의 산물로 인식하는 이들도 꽤 많아졌다.

하지만 너무 자주 써먹었다. ‘원죄’가 옅어지면서 이제 그 시계를 언급하려면 “사실관계를 따져보자”는 반대 세력의 역공을 각오해야 한다. 최근 ‘청와대발 기획 사정’ 의혹 보도 이후 그 대통령을 다시 언급하면서 피의사실 공표 근절을 강조하고 나선 법무부 장관은 “아예 당시 수사 기록을 모두 공개하자”는 공격까지 받았다.

기자 된 입장에서 알 권리 제약 요소가 다분한 ‘피의사실 공표 금지’는 마뜩잖지만, 엄연한 현행법인 이상 100% 존중한다. 그러나 그 제도를 앞세워 진실 규명 노력을 방해하고 사안의 초점을 흐리려는 시도까지 존중할 뜻은 없다. 그리고 현 정권은 이 분야에서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줬다. 장관의 진정성을 선뜻 인정하기 어려운 이유다.

박진석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