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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훈 칼럼

생태탕 vs 코어테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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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훈 기자 중앙일보 주필
최훈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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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로서의 의미야 충분히 소중하겠다. 하지만 지난주 수도 서울의 선거 과정을 지배한 유일한 단어란 ‘생태탕’뿐이었다. 우리 선거와 정치의 참담한 수준을 절감케 했다. 여당의 최고위원이란 분은 “언론이 내곡동 생태탕집 추적 보도를 안 해 졌다”고도 했으니…. 역으로 나라 밖 상황의 엄중함과 정치 지도자의 비전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목격한 것 역시 지난주였다.

서울 선거의 기억 ‘생태탕’ 뿐 #바이든의 21세기 뉴딜과 대비 #부국의 키는 코어테크와 동맹 #차기 대선의 빅이슈 되길 기대

‘21세기 뉴딜’이라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2조 달러(약 2260조원) 인프라 투자가 그것이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투자 패키지 중 건설·복지 외에 전기차(1700억 달러), 클린에너지(1460억 달러), 과학·연구개발 인력 투자(1340억 달러), 초고속데이터통신망(1000억 달러), 반도체(500억 달러), 기후변화·팬데믹 대응(350억·300억달러)등 미래 코어테크(core tech)에의 올인 투자가 유독 눈길을 끈다. 재원을 위한 법인세 인상,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 가능성 , 군사비 삭감 여부 등의 미국 내 논란에도 S&P500 지수가 최초로 4000선을 돌파했다. “모든 배를 부양시킬 마중물 효과가 있을 것(water that lifts all boats)”이란 미국 안팎의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는 게 NYT의 보도다.

바이든의 뉴딜에선 경제뿐 아니라 미·중 냉전 속의 정교한 국제정치적 전략을 엿볼 수 있다. 바이든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코로나 이후) 복원력이 강한 혁신경제를 구축할 것”이라며 “중국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나아가 “21세기의 민주적 자본주의와 (화웨이 등의 거대 기업을 정부 보조로 키우는) 전제정치 간의 대결”이라며 “나의 계획은 민주주의의 효율성을 증명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2차 냉전 속 세계 주도국 유지의 승부처를 코어테크 주도권으로 규정하고, 이 같은 소프트파워의 우위로 미국의 세기를 지속하겠다는 선언 같다.

근대 이후 국가 패권의 성쇠는 그 시대의 코어테크 경쟁이 핵심 변수였다. 최초의 근대적 패권국인 16세기의 포루투갈과 에스파냐, 17세기 네덜란드, 18세기의 영국 1주기, 잠깐의 나폴레옹 프랑스, 19세기의 영국 2주기, 20세기 이후의 미국에서 공통된 사실이었다. 그 시대의 코어테크는 증기기관, 원양 선박과 전함 건조, 나침반·항해 기술과 총포·함포 등의 무기 제조 기술, 포병술 같은 전법이었다. 코어테크 강국들은 예외 없이 직물·철강·화학·에너지 산업과 인구를 확장시켰다(또는 역의 방향으로). 기술자와 상인, 탐험가들이 만끽한 자유롭고 진취적인 공기 역시 공통적. 이 같은 경제-기술-군사력의 선순환을 무기로 희망봉·인도·아메리카의 신대륙을 확장하고, 교역의 헤게모니를 쥐며 융성한 게 강대국의 공식이었다.

세계적 패권의 주기(cycle)를 경제, 국제정치학적으로 연구한 찰스 P. 킨들버거와 조지 모델스키에 따르면 과도한 야심의 전략적 과잉 팽창을 하던 강대국은 산업과 재정, 군사적 공급이  감당할 수 없게 되면서 정통성을 잃고 (delegitimization), 구심력을 상실해 (decentralization) 몰락을 겪는다. 초강대국과의 ‘동맹’을 어떻게 관리하는지는 모든 주변 국가들의 흥망을 좌우했다. 모델스키가 도출한 헤게모니의 주기는 약 100년. 미국의 세기가 시작된 건 1945년 2차대전 이후였다. 바이든은 이미 파리기후변화협약 복귀로 보편적 가치의 정통성을 회복했다. 쿼드(QUAD, 미국·인도·일본·호주)와 ‘민주주의를 위한 정상회의’로 동맹 강화에 나섰다. 여기에 ‘코어테크’의 주도 선언으로 2045년 이후 헤게모니 유지를 위한 3박자 승부수를 띄웠다.

대한민국의 갈 길, 그리고 차기 대통령 리더십의 담론 방향 역시 명확하다. ‘정의’도 중요하지만 구름 위의 논쟁으로만 허송세월하기는 한가한 게 우리 사는 세계다. ‘코어테크’와 ‘동맹’, 그리고 자율과 자유, 창의의 ‘가치’가 차기 대선의 핵심 이슈가 돼야 할 시간이다. 전기차와 2차전지, 풍력·태양광 등의 클린 에너지, IT와 반도체, AI, 바이오와 헬스케어, 친환경 솔루션 등에 나라의 역량을 실용적으로 집중시켜야 마땅하다. 팬데믹 이후 클린에너지, 환경, 탄소중립 등의 세계적 보편 ‘가치’가 ‘돈’이 되는 게 시대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동맹’ 관리 역시 흥망의 관건이다. 미국 내 전기차에 들어갈 중국산 2차전지가 규제된다면 우리의 ‘기회’란 과연 무엇에 좌우되겠는가. 비례적이든, 고슴도치형이든 미·중 냉전 속의 유연하고 실용적인 동맹 전략이 차기 지도자에게 요구될 으뜸의 과제다.

‘공정·평등’을 외치는 진보 정부의 특성인 ‘큰 정부의 규제와 간섭’ 역시 최소화해야 옳다. “정부가 문제의 해결 수단이 아니라 정부 자체가 문제”임을 우리 국민들은 너무 고통스럽게 체감했다. 시민사회의 실력과 열정, 비전이 정부의 그것을 넘어선 지도 꽤 오래다. 제발 그냥 좀 놓아 두라. 미래의 리더십은 코어테크 발전을 지원하고, 동맹을 잘 관리하며, 시민사회의 자율·창의를 극대화하는 것뿐이다. 현재를 소진하면 미래를 갉아먹고만 살아야 한다. 그러고 보니 ‘생태탕’ 선거의 악몽(惡夢)이 더욱 부끄러워진다.

최훈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