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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한국인 전범<戰犯> 마지막 생존자 이학래의 삶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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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한국인 2차대전 전범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인 이학래씨가 96세를 일기로 지난달 28일 눈을 감았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했다. 사진은 지난해 언론 인터뷰에 응한 모습.[로이터 연합]

한국인 2차대전 전범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인 이학래씨가 96세를 일기로 지난달 28일 눈을 감았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했다. 사진은 지난해 언론 인터뷰에 응한 모습.[로이터 연합]

고전명작의 반열에 오른 '콰이강의 다리'는 2차대전 당시의 실화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다. 동남아를 점령한 일본군은 버마(현 미얀마) 진공 작전을 앞두고 보급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열대 밀림 속에 전장 415㎞의 태국~버마 철도를 깔았다. 연합국 포로를 동원된 이 공사에서 콰이강의 다리는 가장 난공사 구간이었다.
이 철도 건설 현장에 1000명 가까운 한국인(당시는 조선인)이 있었다는 사실, 더구나 그 가운데 상당수가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철도 공사를 지휘한 것은 일본군 철도대(鐵道隊)였지만, 포로수용소 관리와 동원·인솔 등의 역할을 한 것은 ‘포로감시원’이란 직책을 부여받은 한국인 군무원들이었다. 일제는 한국인 젊은이 3000여명을 뽑아 군사훈련을 시킨 뒤 태국·자바·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전선에 보내 포로감시 임무를 전담시켰다.
포로들은 가혹한 노동과 열악한 식사로 인한 영양실조, 전염병과 열대성 풍토병에 시달렸다. 30만명으로 추산되는 동남아 전선의 포로 4명 가운데 1명이 숨졌고, 그중에서도 태국~미얀마 철도에 동원된 포로의 희생률은 단연 높았다.

17세에 일본군 포로감시원 동원 #B급 전범 기소, 사형선고 뒤 감형 #아직 이루지 못한 보상ㆍ명예회복 #"정의는 무엇인가" 물음 남기고 별세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점령군과 포로의 입장이 맞바뀌었다. 연합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전범을 체포해 재판에 넘기는 일이었다. 전범은 A·B·C의 세 등급으로 분류됐는데 실제 전장에서 체포된 일본군과 군무원의 다수는 포로학대 혐의로 B급 혹은 C급 전범으로 기소됐다.
조선인 중에서도 148명이 B·C급 전범으로 기소됐고 23명은 사형됐다. 기소자 가운데 125명은 포로감시원이었다. 그 속에 태국에서 포로감시원을 하던 전남 보성 태생의 이학래(당시 20세)씨도 포함돼 있었다. 포로였던 연합국 군인 중 누군가가 “저 사람으로부터 학대를 당했다”고 지목하면 꼼짝없이 용의자로 체포되는 방식이었다. 이 씨는 1차 조사에서 기소 각하 결정을 받고 귀향길에 올라 홍콩까지 왔다가 재체포되어 싱가포르 창이 형무소에 수감된 뒤 사형판결을 받았다.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나날을 보내던 중 그는 20년 징역으로 감형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히로무라(이학래의 일본식 이름)는 사형에 처할 만큼의 학대를 하진 않았다”는 누군가의 진술이 그제서야 받아들여진 것임을 훗날 알게 됐다.

태국 전선에 파견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 맨 왼쪽이 이학래씨.

태국 전선에 파견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 맨 왼쪽이 이학래씨.

이 씨를 포함, 징역형에 처해진 동남아 각지의 B·C급 전범들은 1951년 도쿄의 스가모 형무소로 이감됐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에 따라 형의 집행을 일본이 승계하게 된 데 따른 조치였다. 일본 정부는 이를 계기로 ‘전상병자 전몰자 원호법’등을 제정해 전범들도 원호대상에 포함시켰다. 국가의 요구로 전쟁터로 나가 국가의 지시를 이행한 결과 전범 낙인과 함께 처벌까지 받은 자국민들에게 응분의 구제조치를 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조선인과 대만인 등 식민지 출신 전범들은 제외됐다. 강화조약 발효와 동시에 일본 국적을 상실했다는 형식논리를 앞세웠다. 일본인으로 태어나 일본인으로 전쟁터에 끌려갔다가 처벌을 받았으나, 이제는 일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구제받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이 무렵부터 이 씨의 기나긴 투쟁이 시작됐다. 이 씨를 비롯한 조선인 전범 생존자들은 동진회(同進會)를 결성하고 조선인 전범도 동등하게 구제조치를 해 줄 것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시간을 끌던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의 체결로 모든 과거사 문제가 해결됐다는 논리로 거부했다.

1945년 히로무라 가쿠라이란 일본식 이름으로 연합국 전범재판에 기소된 시절의 이학래씨.

1945년 히로무라 가쿠라이란 일본식 이름으로 연합국 전범재판에 기소된 시절의 이학래씨.

이 씨를 비롯한 전범 7명이 법정 투쟁에 나선 것은 1991년부터다. 8년간 계속된 재판에서 원고들은 1·2·3심 모두 패했다. '심각하고 심대한 희생과 피해'를 입은 사실은 인정되지만 현행법상 구제의 길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법이 없으면 법보다 상위 개념인 조리(條理)에 따라 보상해야 한다"는 원고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2심법정인 도쿄고등재판소 재판부는 판결문에 “문제의 조기해결을 위해 적절한 입법조치를 강구하기를 기대한다”고 적시했고, 최고재판소(대법원에 해당)의 판결문에도 “보상은 입법의 재량”이라고 명기됐다. 재판이 아니라 입법에 따른 보상이 바람직하다는 취지로 이해됐다.

이에 고무된 이 씨는 활동의 중심을 입법 운동으로 옮겼다. 수없이 의원회관을 드나든 끝에 야당인 민주당 중심으로 2008년 1인당 300만엔의 특별급부를 지급하는 법안이 마련돼 제출됐으나 회기 내에 처리되지 못하고 폐안(廢案)됐다. 2016년에는 자민당 의원까지 가세해 새로운 법안이 만들어졌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큰 성과라 할 수 있지만 법안 상정과 심의를 거쳐 통과되기까지는 여전히 문턱이 높다.

이 마지막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이학래씨는 지난달 28일 96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나흘 뒤 국회에서 열리기로 예정된 ‘외국인 전범자 조기 해결을 위한 모임’에서 영상 연설을 하기로 돼 있었다. 이날 행사는 자연스레 이학래 추도회가 되고 말았다. 일·한의원연맹 간사장인 가와무라 다케오(河村建夫) 자민당 의원은 “다시 한번 입법 절차를 진전시켜 나가고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를 이대로 끝낼 수 없다”며 의지를 보였다.

이 씨를 비롯한 B·C급 전범의 행위는 가해자적 측면과 피해자적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포로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부정할 수 없는 가해자였다. 비록 자신의 의지로 적극적 학대행위를 한 기억은 없고, 일제 군부의 최말단에서 상부 지시대로 임무 수행을 한 것이라고는 해도 책임은 회피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필자와 만났을 때 한 구술이나 회고록·인터뷰 등에 따르면 이 씨는 평생 부채의식과 그에 따른 책임감을 갖고 살았다.
이 씨는 1991년 8월 일본인 연구자의 주선으로 용기를 내 호주에 갔고, 심포지엄에서 공개 사죄를 했다. 그가 관리하던 포로이자 그를 고소했던 사람을 만나 사죄하고 화해의 악수를 했다.

하지만 B·C급 전범들은 보다 근본적 의미에서 일제의 피해자였다. 17세에 포로감시원이 된 이 씨의 경우처럼 인원 할당을 받은 면사무소의 강요와 어차피 징용 또는 징병으로 끌려가는 것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지원한 ‘반강제’적 사례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해 한국 정부는 2006년 B·C급 전범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로 공식 인정했다. 이학래씨가 생전 가장 기뻐한 것은 당시 라종일 주일대사로부터 피해자 인정서를 받았을 때였다.
이로써 그가 품고 있던 조국 한국에 대한 부채의식을 약간은 덜 수 있었다. 그는 “같은 시기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도 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일본군을 도운 것이 사실이었다. 변명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가 1956년 가석방으로 풀려난 뒤에도 오랫동안 한국 땅을 밟지 못했던 이유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 굽이칠 때마다 예기치 않은 희생자가 생겨난다. 힘과 이념, 탐욕이 국가권력을 움직이고 인간의 이성을 지배하는 시기일수록 나약한 개인은 역사의 제물이 되기 쉽다. 식민통치와 전쟁의 비극을 헤쳐나온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 씨와 같은 운명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평생 전범 낙인을 안고 산 이학래씨는 한국인 B·C급 전범 148명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다. 위안부, 강제징용 등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 문제가 남아 있지만 B·C급 전범 문제 역시 역사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내지 못한 사례중 하나다. 지난 7일 아사히 신문은 그의 죽음을 계기로 일본 정부와 일본 사회의 각성을 통렬하게 촉구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이 나라의 정의와 양식은 무엇인가. 정치의, 그리고 정치의 부작위(不作爲)를 못 본 체해 온 국민의 책임을 묻는다. ”
오랜 기간 이학래씨의 조력자였던 최봉태 변호사는 같은 질문을 한국 정부와 한국 사회에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국민이 외롭게 수십년 동안 명예회복을 위해 싸우는 동안 한국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 이학래씨가 한국 헌법재판소에 낸 헌법소원은 7년째 잠들어 있다. ”

오랜 기간 이학래씨의 조력자였던 최봉태 변호사 [대구=예영준 기자]

오랜 기간 이학래씨의 조력자였던 최봉태 변호사 [대구=예영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