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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장수말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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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해리 기자 중앙일보 기자
박해리 정치국제기획팀 기자

박해리 정치국제기획팀 기자

4월은 장수말벌이 잠에서 깨어나는 시기다. 장수말벌은 벌목(目) 말벌과(科) 중 가장 몸집이 크다. 몸길이가 어른 새끼손가락만 한 5cm에 이른다.

동면에서 깨어난 장수말벌 여왕벌은 땅이나 지붕 밑에 초기 둥지를 튼다. 밀랍으로 집을 짓는 꿀벌과 달리 말벌과는 나무껍질을 활용한다. 몇 달간 목재펄프를 씹어 붙이며 종이 재질의 둥지를 확장해 나간다. 1719년 프랑스 곤충학자인 르네 앙투안 레오뮈르는 말벌의 집짓기를 관찰하며 ‘이 곤충의 행동을 열심히 따라 하면 진짜 종이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곧장 프랑스 왕립아카데미 회원들에게 이 아이디어를 발표했지만, 제지업계 전반에 그의 발견이 적용된 것은 100년도 더 흘러서다. (키스 휴스턴, 『책의 책』 151쪽)

장수말벌이 만든 벌집은 예부터 뛰어난 약재로도 쓰였다. 말벌과가 만든 벌집은 한의학에서 ‘노봉방(露蜂房)’이라 불린다. 크기로는 장수말벌 노봉방이 으뜸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노봉방은 ‘적백리(赤白痢, 이질의 한 종류)를 치료하고, 대소변이 나오지 않는 것도 치료한다. 벌집 꼭지를 가루내어 한 돈씩 따뜻한 술에 타 먹으면 효과가 있다’고 한다. 포털 사이트 쇼핑에 노봉방을 검색하면 1㎏에 10만원씩 판매한다.

최근 남의 집 처마 밑 장수말벌 벌집을 가져갔다가 특수절도죄로 유죄를 선고받은 이들이 항소심에서 무죄를 받았다는 뉴스가 화제였다. 원심 판결은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이었다. 하지만 피고 측은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물건으로 절도죄 대상이 될 수 없다”며 항소했다.

판결 내용이 퍽 흥미롭다. 항소심 재판부는 벌집이 약용으로 거래되는 등 20만원 상당의 재산적 가치가 있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집주인이 벌집 소유권을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벌집이 자연히 생겨난 점, 벌집이 비워진 상태였던 점, 집주인이 벌집을 인지했음에도 몇 달씩 방치했던 점이 판단 근거였다. 그야말로 ‘벌도 집주인도 주인이 아니니 가져간 사람이 임자’다.

벌집 소유권을 따지는 판결 내용을 보며 문득 최초 집 주인인 장수말벌의 심경이 궁금해졌다. 긴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와 ‘벼락 무주택자’가 됐다는 걸 알게 된 장수말벌의 기분은 어땠을까? 또다시 힘겹게 목재펄프를 씹으며 내 집 마련할 생각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박해리 정치국제기획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