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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화폭에 아이 마음과 노인 마음, 관람객은 눈물 흘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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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열, 무제, 2021, 캔버스에 혼합매체, 112x145.5cm. [사진 학고재갤러리]

오세열, 무제, 2021, 캔버스에 혼합매체, 112x145.5cm. [사진 학고재갤러리]

오세열, 무제, 2021, 캔버스에 혼합매체, 112X145.5cm. [사진 학고재갤러리]

오세열, 무제, 2021, 캔버스에 혼합매체, 112X145.5cm. [사진 학고재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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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화폭에 아이가 반복해 써넣은 듯한 숫자가 가득하다. 그림을 마주한 순간 어릴 적 초등학교 교실의 칠판이 떠오르기도 하고, 방바닥에 엎드려 낙서하던 공책이 기억난다. 요즘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에서 보던 반듯한 숫자와는 거리가 먼 손의 흔적, 서툶과 정성 사이, 놀이와 공부의 경계가 모호했던 시간들. 오세열(76) 화백의 그림을 마주하는 순간, 사람들은 이미 멀어진 어린 시절 기억을 본능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오세열 개인전 '은유의 섬' #"내면 순수함 쌓아올린 섬" #마음 돌아보게 하는 24점

서울 학고재갤러리에서 오세열(76) 화백의 개인전 '은유의 섬'이 8일 개막했다. 유년의 기억을 재료로 작업하는 그의 화폭엔 아이가 무심하게 낙서한 듯한 숫자와 이미지가 부유한다. 그 안에 매끈하고, 반짝거리고, 완결된 것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듬성듬성 여백이 눈에 띄지만, 희한하게도 그의 화폭은 그 자체로 풍성하고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자연스러운 게 가장 풍성하다

전시장에서 만난 오 화백은 "아이들은 생각하면서 낙서하지 않는다. 신이 나서 하고 싶은대로, 손이 가는 대로 끄적인다.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게 그 안에 있다"고 했다. 그는 "잘 그리려고 애쓰지 않는다. 잘 그리는 그림은 싫증만 난다"며 "이제 어른이 된 몸은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갈 순 없다. 난 흉내만 내는 것"이라며 웃었다.

7년 전 목원대 교수직을 마무리하고 삶의 터전을 대전에서 양평으로 옮긴 그의 그림엔 자연이 묻어 들어와 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이한 노란 바탕의 그림 '무제'(2021)는 지난가을 작업실 인근 용문사에서 땅바닥에 차곡차곡 쌓인 은행잎을 보고 그린 그림이다. 노란빛으로 선명한 화면엔 눈 부신 햇살 반, 숫자 반이다. 그는 "숫자는 어릴 때 무엇인가를 새로 익히던 첫 경험을 떠오르게 한다. 몽당연필을 쥐고 숫자를 쓰던 시절부터 시작해 우리는 평생 숫자와 함께 하는 삶을 산다"고 했다.

오세열, 무제, 2019. 함지박에 혼합매체, 69x46cm. [사진 학고재갤러리]

오세열, 무제, 2019. 함지박에 혼합매체, 69x46cm. [사진 학고재갤러리]

오세열, 무제, 2019, 캔버스에 혼합매체, 72x90cm. [사진 학고재갤러리]

오세열, 무제, 2019, 캔버스에 혼합매체, 72x90cm. [사진 학고재갤러리]

투박한 함지박에 그린 인물 그림도 눈에 띈다. 누군가에게 전해줄 꽃을 뒤춤에 감추고 서 있는 소년의 모습이다. 미완성에 가까워 보이는 화면 속 소년은 관객에게 외롭거나 수줍고 설레는 소년의 감정을 맘껏 상상하게 한다.

대형 화면 부유하는 숫자 사이로 꽃이 피어있는가 하면, 네모 창문이 걸려 있다. 여기저기 선명하게 오린 색종이가 붙어 있거나 단추가 붙어 있고, 심지어 플라스틱 뚜껑도 캔버스 위에 살포시 앉아 있다. 노화가가 화폭 위에 정교하게 구축한 조형의 세계다. 미술평론가 박영택 경기대 교수는 "오 화백의 그림은 가로선이 그어진 노트의 행간을 연상시키거나 칠판 자체인 것처럼 위장돼 있다"면서 "화면은 그 모든 것들이 무성하게 피어나는 대지와도 같다"고 평했다.

비례와 균형, 리듬과 깊이감

오세열, 무제, 2021, 캔버스에 혼합매체, 91x72.5cm. [사진 학고재갤러리]

오세열, 무제, 2021, 캔버스에 혼합매체, 91x72.5cm. [사진 학고재갤러리]

오세열, 무제, 2021,캔버스에 혼합매체,130x97cm, [사진 학고재갤러리]

오세열, 무제, 2021,캔버스에 혼합매체,130x97cm, [사진 학고재갤러리]

단순한 이미지가 배치된 단색조의 화면이지만 "동심을 흉내 노화가의 작업은 굉장히 치밀하고 정교한 계산으로 이뤄진다. 단색조의 물감을 여러 겹 쌓아 올린 다음에 못과 면도칼 등 뾰족한 도구로 긁어내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이를테면 칠판에 백묵으로 쓰인 듯한 숫자 하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면도날이 표면을 수십차례 긁고 간 흔적이다.

그는 "숫자를 그냥 써내려가지 않는다. 거친 것과 고운 것, 큰 것과 작은 것 등 조형의 변화와 리듬을 생각했다"면서 "무엇보다 선의 변화가 핵심이다. 비례와 균형, 리듬과 깊이감 등 회화적인 요소가 풍성해야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연, 기도, 그리고 그림

'은유의 섬' 전시가 열리고 있는 학고재갤러리의 오세열 화백. [사진 학고재갤러리]

'은유의 섬' 전시가 열리고 있는 학고재갤러리의 오세열 화백. [사진 학고재갤러리]

이번에 전시한 24점 중 작가가 "내가 회화적으로 추구하는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고 소개한 작품이 있다. 캔버스에 작은 스테인리스 스푼과 색칠한 플라스틱 뚜껑을 붙여놓은 '무제'(2018)다. 자신의 손바닥으로 스푼을 가려 보인 그는 "이 스푼이 여기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따라 그림은 완전히 달라진다. 딱 있어야 할 자리에 이 스푼을 배치했다"고 말했다. 일상의 작은 사물들은 노련한 화가의 시선을 통해 새 생명을 얻고 꽃처럼 피어났다.

박영택 평론가는 "오세열의 화면은 화폭은 내면의 순수함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은유의 섬이다. 작가의 유년기 기억과 현재의 마음이 하나의 화면 위에 사이좋게 공존한다"고 말했다.

70대의 화가가 끊임없이 아이의 마음을 떠올려가며 작업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몇 년 전 전시장에서 내 작품을 보던 관람객이 눈물 흘리는 것을 우연히 봤다"면서 "나중에 내 작품이 그분의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내가 그리는 그림이 누군가의 마음을 다독여줄 수 있다는 게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양평에서 내게 자연과 기도, 그리고 작업이 삶의 중심"이라며 "중요한 건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게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것처럼 나는 매일 무엇이 작가의 사명인지 묻고 또 물으며 작업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5월 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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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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