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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정하의 시시각각

민주당만 몰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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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정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오른쪽)가 3월19일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출연해 "LH사건 때문에 위축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튜브 캡처]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오른쪽)가 3월19일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출연해 "LH사건 때문에 위축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튜브 캡처]

김정하 정치디렉터

김정하 정치디렉터

역사는 가끔씩 인간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자신의 균형을 맞춘다. 2011년 오세훈 시장은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불발되자 서울시장직을 내던져 보수 몰락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의외의 보궐선거로 들어선 후임 시장 박원순은 3선을 하면서 서울시를 진보의 철옹성으로 개조했다. 그랬던 박원순 전 시장이 성추문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꼭 10년 만에 또다시 돌발적인 보궐선거가 열렸고, 이번에 들어선 후임 시장이 하필 박 전 시장의 전임자란 사실은 만화 같은 시나리오다.

유권자 염장 지른 이해찬 발언 #독선,오만 속에 양심,원칙 내던져 #환골탈태 없이 위기 극복 어려워

이번 4ㆍ7 재ㆍ보선에서 민주당의 역대급 참패가 진보 몰락의 오프닝이라고 단정하는 건 좀 성급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추정할 수 있는 징후는 제법 충분하다. 민주당이 유권자의 레드카드를 받은 근본적 원인은 자신들이 절대선이라는 자아도취에 빠져 너무나 오만했기 때문이다. 2016년 총선부터 내리 4연속으로 전국 단위 선거에서 승리하자 드디어 자신들만의 천년왕국이 도래한 것으로 착각했다. 당의 체질이 한때는 날렵한 근육질이었으나 지금은 뱃살에 기름이 잔뜩 끼었다.

민주당의 교만한 정신세계를 잘 보여주는 케이스가 당의 ‘상왕(上王)’이라는 이해찬 전 대표의 발언이다. 그는 지난달 19일 친여 유튜브 방송에서 “선거가 아주 어려울 줄 알고 나왔는데 요새 돌아가는 것을 보니 거의 이긴 것 같다”고 말했다. 모든 여론조사가 민주당의 대패를 예고하고 있는데 이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일까. 당의 실세가 이런 소리를 하니 선거 캠프에서 아무리 “한 번만 살려달라”고 읍소해 봐야 먹힐 리 없다. 이 전 대표는 심지어 LH 사태와 관련해 “위에는 맑아지기 시작했는데 아직 바닥에 가면 잘못된 관행이 많이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유권자의 염장을 지르려고 아주 작정을 했던 모양이다. 하긴 이 전 대표 정도의 위치면 흑석동 상가 투기 때문에 옷을 벗은 청와대 대변인은 바닥급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곧바로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과 박주민 민주당 의원의 임대료 인상 논란이 터지면서 윗물도 그리 맑지는 않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지난해 10월29일 이낙연 당시 민주당 대표가 의원총회에서 "서울,부산시장 후보 공천을 통해 시민의 심판을 받는 것이 책임있는 도리라는 생각에 이르렀다"며 당헌 개정 방침을 발표하고 있다. 이 전 대표의 발언대로 민주당은 4.7 재.보선에 후보를 출마시켜 서울,부산 시민들의 심판을 받았다.           [뉴스1]

지난해 10월29일 이낙연 당시 민주당 대표가 의원총회에서 "서울,부산시장 후보 공천을 통해 시민의 심판을 받는 것이 책임있는 도리라는 생각에 이르렀다"며 당헌 개정 방침을 발표하고 있다. 이 전 대표의 발언대로 민주당은 4.7 재.보선에 후보를 출마시켜 서울,부산 시민들의 심판을 받았다. [뉴스1]

특정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권력에 도취한 나머지 민주당 전체가 염치를 상실했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이 물리적 충돌까지 감수하면서 선거법 개정안을 강행 처리한 것은 ‘선거법은 합의로 처리한다’는 오래된 국회의 전통을 깬 독선적 행위였다. 더 황당한 건 새 선거법 체제에서 야당이 자구책으로 위성정당을 설립하자, 민주당도 “우리도 손해볼 수 없다”며 당원투표를 통해 위성정당을 만든 것이다. 이건 자신들이 밀어붙인 선거법 개정안의 취지를 스스로 무산시킨 작태인데, 이런 정치적 난동을 부려놓고도 누구 하나 책임진 사람이 없다.

이번 재ㆍ보선도 마찬가지다. 민주당 당헌엔 원래 “당 소속 선출 공직자가 부정부패 등 중대한 잘못으로 직위를 상실하면 보궐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런데 박 전 시장과 오거돈 전 시장이 성추문을 일으켜 서울ㆍ부산에서 보궐선거가 열리게 되자 이번에도 잽싸게 당원투표를 통해 후보를 낼 수 있게 당헌을 바꿔버렸다.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면 양심과 체면·원칙 같은 건 얼마든지 내팽개치겠다는 자세다. 그렇게 하고도 21대 총선에서 대승을 거뒀으니 이번에도 별문제 없을 것이라고 봤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난 총선은 코로나 사태 때문에 국민이 여당에 마지막 기회를 준 것으로 봐야 한다. 민주당이 총선 압승 뒤 더욱 기고만장하자 민심이 이번엔 기어이 폭발하고야 말았다.

지난해 7월30일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단독 상정한 주택임대차보호법이 통과되자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가 기뻐하고 있다. 이 법안 통과 직전에 김상조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과 박주민 민주당 의원이 임대료를 5%이상 인상한 사실이 최근 드러나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연합뉴스]

지난해 7월30일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단독 상정한 주택임대차보호법이 통과되자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가 기뻐하고 있다. 이 법안 통과 직전에 김상조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과 박주민 민주당 의원이 임대료를 5%이상 인상한 사실이 최근 드러나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연합뉴스]

흔히 민주당의 재ㆍ보선 참패는 LH 사태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LH 사태는 잔을 넘치게 한 마지막 한방울이었을 뿐이다. 잔의 밑바닥에선 조국수호대, 피해호소인, 금태섭 축출, 윤석열 공격 등 민주당의 후안무치에 대한 분노가 오래전부터 부글거리고 있었다. 민주당만 그걸 몰랐을 뿐이다. 민주당의 이번 위기는 환골탈태 없이 잔재주로만 극복하긴 어려울 것 같다. 정치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