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오래]내가 늘 왼쪽 끄트머리에 앉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49)

결국 오늘 이 이야기를 오픈하게 되다니. 인생사 정말 내일을 장담할 수 없다. 뭐, 못할 얘기는 아니다. 그렇다고 자랑할 일은 더더욱 천번 만번 아니다. 그 일을 이렇게 신문지면에 말할 날이 올 줄 몰랐을 뿐이다. 이 글을 쓰다 말고 내가 내게 묻는다.

“나 지금 웃고 있니?”

내가 내게 대답한다.
“그래, 너 지금 웃고 있다. 후후후. 넌 참, 너답다.”

참나 원, 어찌 내 인생스토리는 이리도 다양할까. 우물도 아닌데, 퍼내고 퍼내도 끝없다. 일부러 이렇게 만들라 해도 힘들 것이다. 그건 엄연한 사고였다. 내 삶의 절반을 꺾은 사고.

모임에 나가면 장소가 어디든, 나는 늘 왼쪽 끄트머리에 앉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대화할 때 항상 상대의 입 모양에 집중한다. 상대 입술이 만드는 발음을 눈으로 읽으며 귀로 말을 들어야 알아듣기 쉽다 [사진 pxhere]

모임에 나가면 장소가 어디든, 나는 늘 왼쪽 끄트머리에 앉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대화할 때 항상 상대의 입 모양에 집중한다. 상대 입술이 만드는 발음을 눈으로 읽으며 귀로 말을 들어야 알아듣기 쉽다 [사진 pxhere]

이쯤에서 허공에 대고 한 가지 묻고 싶어진다. 타인의 고난은 나의 기쁨일까? 내가 당한 일이 아니면 무엇이든 다 재미있을까? 그래 어차피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상 차라리, 이 글을 읽는 그대여 잠시 재미라도 있길 바란다. 어쩌랴. 그렇다고 내가 나쁜 도둑질을 숨겨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 일에 관한 한 나는 무척 당당하다. 아니지. 좀 더 정확히 말해, 나는 실로 엄청난 피해자다. 이 사실만은 변함없다. 그 긴 시절을 견디며 살아온 내게, 정말이지 무척이나 고생 많았다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내 가슴에 나를 안고 조용히 위로해주고 싶을 정도다.

모임에 나가면 장소가 어디든, 나는 늘 왼쪽 끄트머리에 앉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대화할 때 항상 상대의 입 모양에 집중한다. 상대 입술이 만드는 발음을 눈으로 읽으며 귀로 말을 들어야 알아듣기 쉽다. 누군가와 나란히 길을 걸어가도 나는 반드시 상대의 왼쪽에 서서 걷는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 50년은 족히 넘은 아주 오래된 행동이다. 어릴 때 엄마 젖 떼고 시작된 행동이니 오래돼도 한참 오래됐다. 이게 뭔지 궁금하시면 끝까지 읽어보시라. 이 글을 다 읽고 그대가 웃어도 정말 괜찮다. 나는 다 이해할 수 있다. 아니, 나도 그대와 함께 배꼽 잡고 웃을 수도 있다 이제는.

제자 분들과(문학 안에서는 제자들이지만, 스승인 나보다 대부분 연상이므로 평소에도 나는 꼭 존칭을 붙인다) 문학모임을 갖고 식당에서 회식하다 보면 간혹 해프닝이 벌어진다. 제자 분들은 스승인 내게 예의를 갖춰 테이블 중앙에 자리를 마련해 주신다. 사제지간이 오래된 분들은 나를 잘 알아서 내가 앉는 위치를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새로 오신 분은 여지없이 중앙에 내 자리를 만들어놓고 기다린다. 그때마다 참 감사하다. 덕분에 나도 섬김에 대해 한 번 더 되새기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그 자리에 다른 분 앉으시라 하고 왼쪽 맨 끄트머리에 가서 앉는다. 나는 거기가 편하다. 또한, 거기 앉아야 그분들과 잘 대화할 수 있다. 그런 내게, 새로 오신 제자 분이 한마디 하신다.

“사부님 중앙에 앉으셔야죠. 왜 끝에 앉으세요? 말도 안 됩니다.”

그쯤 되면 그분께 내 상황을 알려드린다. 예민했던 사춘기에는 이것이 정말 큰 고민이었다. 친구들과 왁자지껄 걷다 보면 내가 그들의 왼쪽을 고수하기 힘들 때가 많다. 어쩌다 그들 오른쪽에서 걷다 보면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지만 언어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다. 친구 말이 내 귀에 또렷이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웅~ 웅~ 소리만 들리다 끝난다. 상황이 그러니 알아듣지 못했으면서도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일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고 나면 다음 말은 할 수 없었다. 친구 말을 알아들었어야 다음 말을 주고받을 것 아닌가. 바로 옆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못 알아들었으니 다음 말을 이어가지 못한다. 그럴 때마다 답답하고 자존심도 수없이 상했다. 분명 같은 공간에 있었음에도 친구들이 나눈 대화 내용이 뭐였는지 알지 못하고 헤어지는 날도 많았다. 내 사정을 잘 모르는 친구들은 나를, 입이 아주 무거운 아이로 자기들끼리 결론 내렸다.

나를 더 난처하게 만드는 일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30년간 이어지며 나를 괴롭혔다. 알고 보면 매우 심각한 증상이었는데, 나는 ‘그것’이 ‘나’를 ‘괴롭혔다’고 표현하기로 한다. [사진 pixabay]

나를 더 난처하게 만드는 일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30년간 이어지며 나를 괴롭혔다. 알고 보면 매우 심각한 증상이었는데, 나는 ‘그것’이 ‘나’를 ‘괴롭혔다’고 표현하기로 한다. [사진 pixabay]

이것 뿐이면 내가 오늘 이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았다.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니까. 나를 더 난처하게 만드는 일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30년간 이어지며 나를 괴롭혔다. 알고 보면 매우 심각한 증상이었는데, 나는 ‘그것’이 ‘나’를 ‘괴롭혔다’고 표현하기로 한다. 정말 끔찍했다.

내가 네 살 때쯤 된 가을이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마당 가득 메주콩이 주렁주렁 달린 줄기를 널어놓고 타작 중이셨다. 그 당시 인력용 탈곡기가 있었다. 철사를 세모로 꺾어서 아주 조밀하게 박은 둥근 몸체. 발판을 밟으면 원통이 둥글게 급회전하며 ’개갱~개갱~’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탈곡기는 성장하면서 갖고 놀아서 나도 잘 안다. 그 곁에 있으면 소음에 귀가 멍멍할 지경이다. 부모님은 탈곡기 앞에 나란히 서서 한발로 풍금처럼 탈곡기 발판을 연거푸 밟아가며 거기에 온종일 콩을 털었다. 여덟 살 작은 오빠와 그 당시 네 살이었던 나는 콩 터는 마당 한쪽에서 사이좋게 놀았다고 한다. 사건은 그날 벌어졌다.(다음화에 계속)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