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 룽윈의 윈난 군·정 권력 박탈 위해 비밀공작

중앙선데이

입력 2021.04.10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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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71〉

항일전쟁 기간 공군기지 건설에 동원된 윈난의 소수민족. [사진 김명호]

항일전쟁 기간 공군기지 건설에 동원된 윈난의 소수민족. [사진 김명호]

1959년 12월 4일, 중국최고인민법원이 특사 명단을 발표했다. 10년째 수감 중인 전 쿤밍 방위사령관 두위밍(杜聿明·두율명)도 전범수용소에서 풀려났다. 1년 후, 미궁투성이였던 룽윈(龍雲·용운)의 몰락 과정을 털어놨다. 두는 룽을 윈난왕(雲南王) 자리에서 끌어내린 ‘우화산(五華山)사건’의 장본인이었다.

“룽 무장 해제시킨 후 데려오라”
장, 쿤밍 방위사령관에게 명령

위기 직감한 룽, 협력자들 찾아
윈난에 온 반장제스 인사들 보호
충칭 정부의 추방 지시도 묵살

왕징웨이, 일본과 평화협상 나서

왕징웨이를 마중 나온 룽윈(왼쪽 셋째)과 허잉친(오른쪽 둘째). 1938년 12월 8일, 쿤밍. [사진 김명호]

왕징웨이를 마중 나온 룽윈(왼쪽 셋째)과 허잉친(오른쪽 둘째). 1938년 12월 8일, 쿤밍. [사진 김명호]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성격부터 꼬집었다. “필요한 사람에겐 비굴할 정도로 몸을 낮췄다. 살의(殺意)를 숨긴 채 삼킬 준비를 철저히 했다. 비난하는 사람은 적으로 간주해 사지로 몰았다.” 룽윈과 왕징웨이(汪精衛·왕정위), 두 사람의 복잡했던 과거도 빠뜨리지 않았다. “1938년 12월, 행정원장 왕이 일본과 평화협상 하겠다며 전시수도 충칭(重慶)을 탈출했다. 하노이로 가는 도중 쿤밍(昆明)에 몇 시간 머물렀다. 룽은 총참모장 허잉친(何應欽·하응흠)과 함께 공항에서 왕을 영접했다. 룽은 왕의 추종자였다. 왕과 단둘이 몇 시간 밀담을 나눴다. 이 일이 있은 후 룽은 충칭에서 열린 회의에 불참했다. 장제스는 룽윈이왕징웨이의 평화운동을 동조한다고 의심했다.”

룽윈도 장제스가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리송한 성명을 냈다. “나는 왕징웨이의 평화운동과 무관하다. 중앙정부의 항일전쟁을 적극 지지한다. 일본이 중국을 대등한 국가로 대하면 평화운동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룽은 난징(南京)에 정착한 왕이 일본의 괴뢰정부 수반에 취임하기 전까지는 비난 성명을 내지 않았다.

쿤밍 방위군사령관 시절의 두위밍(앞 줄 가운데). [사진 김명호]

쿤밍 방위군사령관 시절의 두위밍(앞 줄 가운데). [사진 김명호]

장제스는 룽윈의 처신이 괘씸했다. 윈난군 2개 사단을 전선에 파견하라고 지시했다. 룽은 거부하지 않았다. 장은 윈난군의 빈 자리에 중앙정부군(중앙군) 5군을 주둔시키겠다고 통보했다. 룽이 군말 없이 수용하자 겉으로는 예의를 갖췄다. 윈난 진입을 앞둔 지휘관에게 지시했다. “룽윈에게 절대복종해라. 나를 대하듯 해야 한다. 마찰이 발생하면 국가 대사를 그르친다.” 장은 쿤밍에 방위사령부를 신설하고 특무요원들로 조사과를 꾸렸다. 윈난의 주요 도시에 사복한 중앙군 특무요원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전선에 있는 윈난군을 불러들이겠다는 룽윈의 건의를 묵살했다.

윈난 주둔 중앙군은 날이 갈수록 증가했다. 룽윈은 위기를 직감했다. 협력자들을 찾았다. 중앙정부를 곤혹스럽게 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 윈난을 피난처로 제공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홍콩을 점령했다. 홍콩에 있던 자유주의자와 반장제스 운동의 주류들이 윈난으로 몰려왔다. 룽은 쿤밍에 있는 대저택을 숙소로 안배했다. 국민정부는 룽에게 반정부인사들을 윈난에서 추방하라고 건의했다. 룽은 감시를 철저히 하겠다며 거절했다. 전화(戰火)를 피해 윈난으로 이주한 베이징(北京), 칭화(淸華, 난카이(南開), 세 대학이 쿤밍에 세운 ‘시난(西南)연합대학’이 중국 역사상 최고 학부로 자리 잡기 까지는 룽윈의 지원이 한몫했다.

윈난군, 중앙군과 총격전까지 벌여

1945년 10월 우화산에서 하산하는 룽윈(오른쪽 둘째). [사진 김명호]

1945년 10월 우화산에서 하산하는 룽윈(오른쪽 둘째). [사진 김명호]

장제스는 룽윈이 쥐고 있던 윈난의 군·정 권력을 박탈하기로 작정했다. 1945년 4월 초, 쿤밍 방위사령관 두위밍은 공항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위원장(장제스)이 부른다. 비행기가 대기 중이다.” 충칭으로 간 두는 당일 오후 한적한 교외의 사원에서 장을 만났다. 장이 입을 열었다. “오면서 만난 사람이 있느냐?” “쿤밍에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충칭에 와선 누구를 만났느냐?” “만난 사람 없습니다.” 장은 잘했다며 말을 이었다. “일본군에게 반격을 준비 중이다. 후방 안정이 필수다. 윈난의 정치, 경제, 군사를 일원화해야 최후의 승리를 보장할 수 있다. 룽윈을 중앙의 군사참의원 원장에 임명할 생각이다. 불복할까 우려된다. 군사적으로 해결할 준비를 해라. 내 명령과 동시에 룽윈의 무장을 완전히 해제하고 3일 안에 충칭으로 데려오면 된다. 네 의견이 있으면 말해라.”

두위밍은 쿤밍에 5년간 주둔했다. 룽윈과 사적인 교류가 빈번했다. 만나면 못하는 말이 없었지만, 기댈 언덕은 아니었다. 장제스의 구상에 동의했다. 장은 룽과 측근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빨리 돌아가라며 재삼 당부했다. “비밀을 엄수하고, 신중히 처리해라.” 장은 허잉친에게도 비슷한 지시를 했다. “쿤밍에 가서 두위밍을 독려해라.” 두와 허는 룽에게 사직을 종용하기로 합의했다. “윈난은 룽윈의 왕국이다. 위원장을 비난하는 지식인들의 온상이기도 하다. 병력 동원은 위원장에게 불리하다. 스스로 물러나게 하자.” 두는 룽의 측근들을 설득했다. 훗날 두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당시 룽윈과 위원장의 측근들은 부패하고, 무능하고, 야비하고, 거칠었다. 룽이나 위원장과의 인연 외에는 이렇다 할 재능이 없었다. 다들 동의는 해도 룽이나 장제스에게 건의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결국 총격전이 벌어지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해체된 윈난군의 비극은 6·25전쟁까지 이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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