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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이 ‘가스라이팅’ 이라고? 국립외교원장 저서 논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31호 24면

콩글리시 인문학

몇 년 전 방문했던 미국 UC버클리 캠퍼스에 안내 쪽지 하나가 붙어 있었다. 블랙라이팅(blacklighting)서비스였다. 1990년대 이 대학에 연구교수로 갔을 때는 이런 광고를 본 일이 없었다. 미국 대학에는 외국유학생이 매우 많다. 처음 강의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학생들을 위해 규모가 큰 과목의 경우 한 수강생이 강의내용을 녹음을 했다가 이를 풀어쓴 뒤 판매하는 서비스가 있는데 이를 가리키는 신조어가 blacklighting이다. 어둠을 밝혀 주는 일종의 개명(開明)노트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 심리 조종’ 뜻하는 용어 #북한의 대남 전략과 맥 같은 주장

샤를르 보아이에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추억의 영화 ‘가스등(Gaslight)’을 기억하는가. 조지 큐커 감독의 1944년 흑백영화다. 안개 자욱한 런던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대저택에서 세계적인 오페라 여가수 엘리스가 살해된다. 그러나 경찰은 범인을 찾아내지 못한다. 거액의 상속녀가 된 엘리스의 조카 폴러(버그만)는 이탈리아 유학 중 엘리스의 피아노 반주자였던 그레고리(보아이에)와 사랑에 빠져 학업을 포기하고 돌아와 결혼한다. 결혼 뒤 그레고리의 소원대로 폴러는 엘리스에게 상속받은 대저택에서 살게 된다. 폴러는 물건을 잘 잃어버리고 남의 물건을 훔치기도 하는 등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진다. 그레고리는 아내의 거액 재산을 노리고 폴러의 외출을 막는 등 갖가지 구실을 붙여 정신이상자로 만든다. 집안의 가스등이 매일 밤 흐려지고 다락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해도 남편은 아내를 피해강박과 편집증으로 몬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런던경시청의 브라이언 경위가 사건을 재수사해서 엘리스의 죽음이 값비싼 엘리스의 보석을 훔치다가 들킨 그레고리의 소행임을 밝혀낸다.

여기서 심리학 용어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 나왔다. 다른 사람의 심리나 상황을 조작해서 상대방 스스로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고 마침내 현실감과 상황 판단력을 잃게 만들어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는 정서적 학대를 뜻한다. 1938년대 런던에서 공연된 연극 ‘가스등’에서 핵심주제를 알리는 장치로서 가스등의 불빛을 커졌다 작아졌다 만든 데서 유래한다.

이 용어가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은 “7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한·미 동맹은 신화가 됐고 한국은 동맹에 중독돼 왔다. 이는 압도적인 상대에 의한 가스라이팅(gaslighting) 현상과 닮아 있다”고 자신의 저서 『영원한 동맹이라는 역설-새로 읽는 한미관계사』에 썼다. 김 원장은 “주한미군 철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과정이 될 수 있다”며 “한·미 동맹이 출발부터 기울어져 있었다. 미국은 35년 제국주의를 벗어나게 해 준 ‘해방자’라기 보다는 실제로는 식민지인을 대하는 ‘점령군’에 가까웠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우리에게 디딤돌이냐, 걸림돌이냐에 대해서는 관점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외교관들을 교육하고, 외교안보정책을 연구하는 현직 국립외교원장이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를 빌어 한국은 일방적으로 미국의 조종을 받아 왔다고 말해도 좋을지?

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해체를 옹호하는 이런 태도는 북한의 대남전략과 맥을 같이한다. 누가 뭐래도 미국은 우리에게 디딤돌(blacklighting)이었다.

김우룡 한국외대 명예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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