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는 가라앉는데 선장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9일 여권의 고위 관계자가 현재 상황을 침몰하는 배에 비유했다. 세월호 사건을 연상시키는 이런 비유법은 문재인 정부에선 금기(禁忌)에 해당된다. 선거 참패 이후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의 대응을 지켜본 이 관계자는 “선거 패배 자체보다 민심을 확인하고도 손을 놓고 있는 게 더 문제”라며 “변화 의지도, 계획도, 사람도 없어 안타깝다”고 했다.
◇"의지가 없다"
문 대통령은 선거 다음날인 8일 “낮은 자세로 보다 무거운 책임감으로 국정에 임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어떻게 위기를 돌파할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야당에서 '사죄 코스프레'라는 지적이 나온 이유다.
또 문 대통령은 입장문에서 "코로나 극복, 경제 회복과 민생 안정, 부동산 부패 청산 등 국민의 절실한 요구를 실현하는 데 매진하겠다"며 늘 말해온 내용을 또 반복해 언급했다. 선거 전과 선거 뒤가 달라진 게 없다. 국정 운영 기조를 전환할 의지가 전혀 읽히지 않는다는 비판도 그래서 나온다.
익명을 원한 여권 관계자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정책기조는 대통령이 방향타를 틀지 않으면 바뀔 수 없다”며 “여당이 174석을 확보하고 있지만, 여론이 돌아선 상태에서 어떤 법안도 강행할 명분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폭풍우속에서 기존의 기조를 고집하는 것은 다 같이 죽자는 말과 같다”고 했다.
민주당에선 “제대로 된 인식이 있었다면 하루이틀 안에 최소 쇄신용 개각이라도 발표됐어야 했다”,“시간만 보내고 있다는 것은 준비가 없었다는 뜻이고, 결국 변화 의지 자체가 없었음을 시인한 것”이란 주장도 있다.
실제로 쇄신의 시발점이 될 개각의 시기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개각은 정세균 국무총리의 사퇴와 맞물려 이뤄질 가능성이 큰 데, 정 총리 주변에선 “즉각 사의 표명을 하려고 했지만, 11~13일 순방 때문에 무산됐고, 19~21일 대정부질문까지 잡히며 더 미뤄질 것 같다”는 말이 나온다.
◇"플랜이 없다"
선거 참패로부터 이틀이 지난 9일에도 청와대는 조용했다. 지도부가 총 사퇴한 여권에선 "대통령이 길을 제시하지 않는데 당이 어떻게 움직이느냐"는 말이 나왔다.
과거 정권들은 위기와 레임덕(임기말 권력누수)국면에서 뭔가 돌파구를 만들려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엔 2005년 재·보선 패배로 여당의 과반 의석이 무너지자 야당에 내각 구성권을 주는 내용의 '대연정' 카드를 꺼냈다. 임기 말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했다. 기존의 기조를 뒤집는 결정에 여권에서도 반발이 나왔지만, 노 전 대통령은 그때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며 진영내 반발을 진압했다.
반면 선거에 참패한 뒤 나온 문 대통령의 지시는 기존의 일을 더 열심히 하자는 사실상의 '마이웨이 선언'이 전부였다.
또 다른 인사는 “2030의 이탈이 문제였다면 40대 총리론을 꺼내든, 부동산 정책이 문제였다면 실기를 인정하고 완전한 방향전환이라도 선언했어야 했다”며 “그런데 청와대는 아직 컨셉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부에서는 ‘이번 패배가 대선의 약이 될 것’이라는 말만 나오는데, 이대로 조용히 넘어갔다가는 내년엔 조용히 정권을 내주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안병진 경희대 교수는 “비록 실패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연정 등 레임덕을 돌파해보려는 시도라도 했다”며 “반면 문 대통령은 바꾸려하지 않는다. 고집만 부린다. 비유하면 ‘샌님 정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람이 없다"
청와대 안팎에선 차기 총리 인선과 관련해 "사람이 없다"는 푸념이 나온다.
현재 통합형으로는 김부겸 전 행정안전부 장관, 원혜영 전 의원, 박지원 국장원장 등이 거론된다. 또 경제 전문가로는 김영주 전 산업자원부 장관과 홍남기 현 경제부총리가 하마평에 올랐다. 여성 총리로는 김영란 전 대법관, 유은혜 사회부총리, 이미경 전 의원의 발탁 가능성이 제기된다.
하지만 거론된 인사들을 두고는 "선거 참패 전이나 참패 이후나 후보들의 면면이 바뀐 게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자기 진영 사람이 아닌 파격적인 인재 발탁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현재 문 대통령과 청와대의 접근법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여권의 핵심 인사는 “하마평에 오른 인사 중에서도 본인이 완강하게 사양하는 사례가 있다”며 “변화에 대한 확신 없이 임기말 정부에 누가 승선하려고 하겠느냐”고 했다.
◇"책임이 없다"
선거 참패가 확정된 뒤 청와대와 정부, 여당에선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한 모습도 연출됐다. 일부 청와대 관계자들은 선거 직후 “여당 지도부가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느냐”며 당에 책임을 넘겼다. 반면 당에선 유영민 대통령비서실장 등 참모진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신현수 민정수석 패싱', 김상조 전 정책실장의 전셋값 인상 등 이번 선거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악재들이 청와대발로 터졌음에도 청와대 참모들중엔 아직 사의를 표시한 이가 없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