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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 진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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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현예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김현예 내셔널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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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토머스 브래들리는 출구조사 결과에 승리를 자신했다. 하지만 투표함을 열어보니 결과는 정반대. 여론조사에서 줄곧 선두를 달려왔던 그는 경쟁하던 상대방 후보 조지 듀크미지언에게 1.2%포인트 뒤지면서 패했다.

그가 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브래들리는 흑인, 상대방 후보는 백인이었는데 일부 백인 유권자들이 혹여 ‘인종 편견’이 있어 보일까 싶어 여론조사 등에서 거짓 응답을 한 것이었다. 이 일은 이후 여론조사와 실제 득표율 사이엔 ‘숨은 지지층’이 있다는 의미의 ‘브래들리 효과’로 불리기 시작했다.

선거판에 영향을 주는 숨은 지지층을 ‘샤이(shy) XX’로 부르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10년 뒤의 일이다. 1992년 영국 총선을 앞두고 여론조사 때마다 영국의 보수당은 노동당에 뒤졌다. 실제 선거에선 보수당이 7.6%포인트의 큰 격차로 승리했다. 예상 밖 선거결과에 여론조사 회사들은 보수당의 옛 명칭인 토리(Tory) 앞에 수줍어한다는 의미의 단어인 ‘샤이’를 붙여 보수당의 숨은 지지층을 ‘샤이 토리’로 불렀다.

4·7 보궐선거가 끝났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상임선거대책위원장은 선거 전날까지 “여론조사에 말하지 않던 우리 지지자”를 주장하며 3%포인트 내 박빙 승부로 민주당의 승리를 자신했다. 이른바 ‘샤이 진보’의 존재와 결집을 믿은 셈이다. 하지만 ‘숨어있는 1인치’처럼 기대했던 ‘샤이 진보’는 없었다.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 득표율은 57.5%로 나타났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39%였다. 무려 18%포인트의 격차를 보였다.

숨은 유권자에 대한 정치권의 희망 회로 돌리기는 고질병과도 같다. 2017년 대통령 선거와 2018년 지방선거, 2019년 총선까지 연패 행진을 이어가던 야당도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샤이 보수’의 응답을 갈구했지만 유권자의 냉정한 선택만 확인했을 뿐이다.

선거로 드러난 민심 저변엔 분노가 있다. 25번이나 내놓은 부동산 대책에도 집값은 폭등했다. 여기에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의 땅투기 의혹까지 일며 성난 민심에 불을 질렀다.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이 많다’를 내세운 허경영 후보가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1%가 넘는 표를 받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마음을 감추는 숨은 유권자는 없다.

김현예 내셔널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