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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치료제처럼 코로나 백신 특허권 풀어 생산 늘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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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신성식 기자 중앙일보 복지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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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식 복지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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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95개국 중 백신을 한 명도 안 맞은 나라는 50개국(영국 이코노미스트 집계)이다. 에티오피아·소말리아·콩고민주공화국 등의 아프리카와 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 등의 중앙아시아, 쿠바·수리남 등의 중남미에 많다. 반면 이스라엘·영국·미국 같은 선진국이 코로나19 백신을 싹쓸이했다. 미국은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을 쟁여 두고도 풀지 않는다. 캐나다·멕시코에 400만 도즈를 공유했을 뿐이다. 체코에 코로나19가 급증하자 헝가리·오스트리아·슬로베니아가 백신 이웃돕기를 자처하고 나섰다.

인도·남아공 WTO에 정식 제안 #‘백신 아파르트헤이트’ 대안 부상 #생산 가능 국가 몇 곳 안 돼 걸림돌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최근 온라인판 기사에서 국제 활동가들이 이런 불평등을 ‘백신 아파르트헤이트(vaccine apartheid)’라고 부른다고 소개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주의에 빗댔다. 국제 활동가들은 백신의 특허권을 일시적으로 정지해 생산량을 늘리자고 제안한다. 근거는 세계무역기구(WTO)의 도하선언이다. WTO는 1995년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에 관한 협정(TRIPs)’에서 특허 보호를 결정했다가 2001년 도하선언에서 공평한 의약품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 지적재산권을 제한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특허를 정지하려면 각국 정부가 강제실시권을 동원하면 된다. 인도·남아공은 지난해 10월 건건이 강제실시권을 동원하기보다 코로나19 대유행 기간에 TRIPs를 일괄적으로 유예하자는 청원서를 WTO에 냈다. 세계 90여개국과 국경없는의사회·앰네스티 등 국제단체 300여개가 지지한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도 “지금 아니면 언제”라며 지지한다. 하지만 미국 등 선진국 반대가 큰 장벽이다.

전례가 있다. 90년대 아프리카에서 에이즈가 창궐하자 비싼 약값을 감당하지 못한 남아공을 비롯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 강제실시권을 발동해 연간 1인당 1만 달러인 약값을 1달러로 낮췄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오명돈 서울대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2013년 조류독감이 번지자 글로벌 제약사들이 동남아에 유전체 정보를 달라고 요구했으나 ‘이거 가져가서 백신 만들어 비싸게 팔 텐데’라며 거부했다”며 “이번에 코백스 퍼실리티(국제 백신 공급 공동체)가 출범한 것은 국제 공조 결실”이라고 말했다. 가디언은 국제활동가의 목소리를 빌려 특허 유보의 후보로 모더나 백신을 제시했다. 미국 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와 공동 개발했고, 최종 단계에서 세금 7조원이 지원됐으며, 수많은 미국인이 임상시험에 참여한 점을 들었다. 생산 노하우도 공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피터 메이바덕 ‘의약품 시민접근 프로그램’ 이사는 모더나 백신을 ‘국민의 백신’이라고 평가했다.

세계 코로나백신 접종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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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디언은 특허를 유보해도 백신을 생산할 만한 데가  미국이나 유럽 말고는 별로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미국 텍사스 베일러의대 국립열대의학스쿨의 피터 호테즈 박사는 “백신 생산 인프라와 인적 자본이 문제”라고 말한다. 식약처 관계자는 “에이즈치료제는 화학합성물이라서 원료 확보나 생산이 그리 어렵지 않지만 백신은 생물학적 단백질 제제라서 생산할 수 있는 데가 제한돼 있다”고 말했다. 오명돈 교수는 “코로나19 백신은 안 해본 플랫폼에서 생산한다. 4개 공정으로 나뉘고, 공정별로 공장이 다르다. 공정이 까다로워서 단시간에 많은 양을 생산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묵현상 국가신약개발사업단장은 “백신의 원료는 세포배양 배지(배양액)에다 병·주사기·뚜껑 등의 자재가 필요하다. 백신회사의 기술 이전이 없으면 생산 조건을 찾는 데만 2년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묵 단장은 “우리가 특허를 일시 중단하거나 국내 생산 백신 수출을 중단했다가는 코백스 1000만명분을 못 받게 되고 화이자·모더나가 물량 공급을 줄일 게 뻔하다. 반도체 특허권 중지 등의 반격을 받으면 어떡하느냐”라고 우려한다.

한국 정부도 지난해 말 강제실시권 문제를 분석했으나 실효성이 낮은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보건 당국은 지난달 말 ‘SK바이오사이언스 백신 수출을 인도처럼 막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가 6일에는 “가능한 부분을 최대한 검토하고 있다”고 입장을 바꾸는 듯한 뉘앙스를 비췄다.

오명돈 교수는 “미국이 국제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디언은 “조 바이든 행정부가 7000만 도즈의 백신을 국제적으로 분배하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5일 세계 백신 외교 책임자를 임명한 것도 이의 하나로 보인다. 블링컨 장관은 “가능한 한 빨리 움직이겠다”고 말했다. 7월 4일 코로나 독립을 목표로 정한 만큼 미국의 움직임이 빨라질 수 있다.

다른 대안은 쉽게 많이 생산할 백신을 개발하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5일 기존 독감 백신과 같은 방식의 코로나19 백신 임상시험(1상)이 브라질·멕시코·태국·베트남에서 동시에 곧 시작된다고 보도했다. 미국 마운트 사이나이 이칸 의과대가 개발했다. 달걀에 바이러스를 주입해서 배양하는 전통 방식의 기법이다. 저렴하게 많이 생산할 수 있어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라고 뉴욕타임스는 평가했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