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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황제 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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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진석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담당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대통령 당선인을 방문 조사했습니다.”

2008년 2월 17일 밤 피곤에 절은 기자들이 눈을 번쩍 떴다. 당선인 관련 의혹의 핵심인 투자자문사의 이름을 본 떠 ‘BBK특검’으로 불렸던 그 조직은 지지부진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당선인 조사는 수사의 정점이었다. 하지만 특검팀의 발언은 짧았고, 쏟아지는 질문은 함구에 막혔다.

그럴 만했다. 이튿날 밝혀진 조사 장소는 이른바 ‘요정 정치’의 주 무대였던 최고급 한정식집이었다. 당선인과 특검팀은 3만2000원짜리 꼬리곰탕 정식으로 만찬을 한 뒤 사전에 주고받았던 서면질의서와 답변서를 확인하는 선에서 일과를 마무리했다. 곰탕 식사까지 포함해 2시간이면 충분했다. ‘더치페이’ 해명이 “접대받으러 간 것이냐”는 비아냥을 잠재우진 못했다.

수사 현장에서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말의 비현실성을 드물지 않게 체감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끌려온 뒤 모욕을 동반한 추궁에 벌벌 떨어야 하는 백성과 달리 일부 거물급 인사들은 매우 여유롭게 조사 비슷한 것을 받는다.

‘특혜 조사’의 최고봉은 서면조사다. 주변 두뇌들을 동원해 수사기관이 보내온 질문지를 그럴듯하게 채워 넣으면 된다. 몇몇 대통령과 그 가족, 고관대작들이 서면조사의 특혜를 누렸다. 최신 용례는 아들의 병무 이탈 의혹으로 조사받은 직전 법무부 장관일 것이다.

출장조사, 방문조사 역시 일반인은 꿈도 꾸기 어렵다. 피조사자는 특급 호텔 스위트룸 등에서 번지수를 잘못 찾은 듯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는 수사 요원들을 푸근하게 응대하면 그만이다.

서울중앙지검장에 대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최근 조사는 그 분야에서도 진귀한 사례로 기록될 듯하다. 수사기관을 직접 찾은 피조사자 중 이만한 호사와 특혜를 누린 이는 없었다. 수사 실무에 대한 무지, 조사 원칙의 미정립, 정치적 독립성에 대한 의심 등 이번 ‘황제 조사’가 표출한 공수처의 문제점은 적지 않다. 가장 걱정스러운 건 응당 갖춰야 할 냉정함과 공정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수사기관에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다. 본격 출범을 앞둔 공수처가 제대로 무서운 기관으로 변모하길 기원한다. 축복만 받으면서 탄생한 기관이 아니기에 더더욱 말이다.

박진석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