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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쓴 양반들의 性 담론 ⑥] 금단의 性

중앙일보

입력

성직자들에게 성적 쾌락은 금단의 영역이며, 성(聖)과 속(俗)을 나누는 가장 확연한 분기점은 이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느냐 여부다. 그러나 성에 대한 성직자들의 태도에는 미묘한 점이 있다. 신라 고승 원효가 요석공주와 만리장성을 쌓아 설총이라는 큰 학자를 배출했고, 성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 누구 못지않게 방탕했다.

신앙심 깊기로 이름난 다윗 왕은 신하의 아내를 빼앗기까지 했다. 물론 그들의 일탈은 한때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또 어찌 된 일인가? 불교에는 성교를 통해 성불한다고 가르치는 밀교가 있다. 방중술을 통해 신선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도교의 경전들이 있는가 하면, 일부다처를 주장하는 극소수 몰몬교 신자도 있다.

경건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성생활을 무척 즐겼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일언지하에 이 모든 것은 사교이며 잘못된 수행이라 단언하면 그뿐이다. 그렇게 간단하게 깔아뭉개는 것은 도리어 무식한 짓이다. 도덕적 판단을 잠시 보류한 채 조선의 갓 쓴 양반들에게 이 문제를 물어보면 어떨까? 물론 성직자란 양반들이 보면 비구와 비구니, 즉 남승과 여승이었다.

어느 농부 집에 암말 한 마리가 있었다. 그런데 농부는 너무 가난해 말 먹이로 줄 콩이 부족했다. 그는 생각다 못해 이웃에 있는 절간에 암말을 맡겼다. 큰스님은 당분간이라는 단서를 붙여 암말을 절간에 들여놓았다.

암말은 엉덩이가 유독 컸다. 마침 큰스님은 음욕이 남다른 사람이었는데 여자 없이 적적하게 지내던 참이어서 암말의 궁둥이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큰스님은 말과 즐기기 시작했다. 한 번 해보니 그 맛이 깨소금이었다. 스님은 하루도 빼지 않고 틈만 나면 암말과 정을 나눴다. 자꾸 그렇게 지내다 보니 스님은 암말에게 애틋한 정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어느 날 사미승이 스승님이 암말과 다정히 교합하는 꼴을 엿보게 되었다. 사미승 역시 암말과 운우의 정을 나눠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고난도 작업이었다. 마음만 급할 뿐 도무지 성사되지 않았다. 사미승은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해서 견딜 수 없었다.

어느 날, 큰스님이 다른 절에서 보내온 말을 타고 먼길을 떠났다. 이때다 싶었던지 사미승은 벌겋게 달군 쇠꼬챙이를 가져다 암말의 음문을 사정없이 지져버렸다. 외출에서 돌아온 큰스님은 그런 영문도 모르고 암말과 정든 일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암말은 쇠꼬챙이에 혼난 터여서 지레 겁을 먹고 다가서는 큰스님을 냅다 걷어찼다.

“이년 좀 보게나, 내 잠시 밖에 다녀왔다고 질투하는구나!”
그러면서 큰스님은 다시 암말에게 다가가 재차 시도했다. 암말은 더욱 사납게 날뛰며 이번에는 큰스님의 겨드랑이를 걷어찼다. 그 바람에 갈비뼈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허허, 암말이 질투하는구나”
아픔을 참고 겨우 일어선 큰스님은 암말을 자세히 뜯어보다 음부가 불로 지져진 것을 발견했다. 큰일났다 싶어 큰스님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즉시 암말을 끌고 농부의 집으로 갔다. 사립문 앞 버드나무에 암말을 매 놓고 돌아서는 순간 뜻밖에도 농부의 아들과 마주치고 말았다.

아들에게 큰스님이 말을 도로 데려왔다는 소식을 들은 농부는 인사하러 밖으로 뛰어나왔다. 이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줄 짐작하고 큰스님은 소매를 부들부들 떨며 송낙으로 얼굴을 가린 채 구차한 변명을 내뱉으며 도망치듯 사라졌다.

“이 댁 말은 음부가 본래 번질번질하더군. 반질반질하더라고!”
말 주인은 큰스님이 왜 그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농부는 잘 알 수 없는 일. 스님이 수간(獸姦)을 범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으랴!

기독교문명권에서는 동물과의 성교가 금기시돼 발각되면 엄한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유교문화권인 조선에서 스님의 수간은 용납되었다. 적어도 양반들의 의식세계 속에서는 그럴 수 있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위에 소개한 이야기가 증거라면 증거다. 암말과 성관계를 꿈꾼 것은 큰스님뿐만 아니라 사미승도 마찬가지였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욕이 있게 마련인데, 그 욕망이 분출되지 못하고 억눌리니 배출구를 찾아 어디론가 쏠리게 된다는 뜻을 담은 이야기다.

또 한 가지 숨은 뜻이 이 이야기 속에 녹아 있다. 성욕의 해소는 결국 부와 권력의 문제로 압축된다는 것이다. 사미승의 성적 욕망이 큰스님보다 적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암말은 당연히 큰스님 차지였다. 큰스님이 암말을 정복(?)할 수 있었던 까닭, 그가 암말을 데려올 수 있었던 근본적 동기도 그의 권력 덕택이다.

가난한 농부에 비해 큰스님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인 면에서 강자였다. 세력자인 큰스님은 부끄러워할지언정 책임지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원하면 언제라도 암말을 되돌려줄 수 있었다.

만일 암말의 음부에 상처가 나지 않았더라면 큰스님은 꽤 오랫동안 암말과의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양반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이 경우 ‘암말’은 반드시 동물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암말은 하나의 비유로 해석해도 좋겠다. 가난한 농민의 딸과 아내, 양반집 사내종의 아내가 다 암말의 역할을 떠맡을 수 있다. 큰스님이 암말을 유린했듯 양반들은 실제로 평민의 아내와 딸들을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사실이 발각되면 꽤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럴 때도 양반들은 도망치듯 사랑방으로 사라지면 되지 구태여 정색하고 사과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큰스님이 본래 그 말의 음부가 번질거렸다고 말했듯, 양반들은 자신들이 쾌락의 대상으로 삼은 여성이 정조관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난잡한 여성이었다고 둘러대면 되었다. 아마도 암말과 큰스님의 정사 장면을 장난스레 떠벌리며 이야기하던 순간, 갓 쓴 양반들 가운데 어떤 이는 그런 사회적 문법을 넌지시 헤아려 보았을 것이다.

기운이 팔팔한 젊은 스님이 길을 가다 맞은편에서 오는 여자 스님과 눈길이 마주쳤다. 그날 이후 젊은 스님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날마다 하릴없이 그날 그 장소에 나가 여자 스님이 지나가기만 하염없이 기다렸다. 관세음보살이 도우셨는지, 며칠 뒤 젊은 스님은 여자 스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젊은 스님은 바짓가랑이를 내리고 곧추선 자신의 가죽 방망이를 꺼내놓고 비명을 질렀다.

“고구마가 익으려면 아직 멀었소”
“아이고, 아이고! 사람 살려 주시오. 아이고, 나 죽겠네!”

놀란 여자 스님이 황급히 달려가 어디가 불편하느냐고 물었다. 젊은 스님은 자기의 가죽 방망이를 가리키며 갑자기 이것이 딱딱하게 굳어져 아파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여자 스님이 되물었다. 붉어진 그 물건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젊은 스님은 “고구마!”라고 했다. 그러면서 넉살 좋게 설명을 붙였다.

“이 고구마라고 하는 것이 자주 냄비에 담아 삶아줘야 물렁물렁해지는 것인데 그러지 못했어요. 10년 넘게 이 고구마를 한 번도 삶아보지 못해 가끔 이렇게 화를 내며 딱딱하게 굳어진답니다. 그러면 아주 죽을 지경이 된답니다. 살려주세요, 제발!”

여자 스님은 입맛을 다시며 자신이 도와주고 싶기는 하지만 냄비가 없어 어쩔 도리가 없노라고 했다. 젊은 스님은 여자 스님에게 냄비를 빌려 달라고 몇 번이나 졸랐다. 그때마다 여자 스님은 없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고 버텼다. 그러자 젊은 스님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자신이 입고 있던 도포를 벗어 풀밭에 깔며 잠시 그 위에 좀 누워보라고 했다. 마지못한 표정으로 여자 스님이 도포 위에 살포시 누웠다.

“그럼, 이제부터 제가 스님의 냄비 뚜껑을 열고 얼른 불을 지피렵니다.”
젊은 스님은 이 말과 함께 재빨리 여자 스님의 승복을 벗겨내고 검은 숲으로 둘러싸인 작고 아름다운 계곡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바로 이것입니다. 제 몸에 달린 고구마를 삶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어여쁜 냄비가 여기 있군요.”
“아니 그럼, 스님의 고구마를 이 안에 밀어 넣어 삶으실 셈이로군요?”

여자 스님은 즐거운 표정으로 응수했다. 젊은 스님은 벙긋 웃으며 “나무 도로아미타불 도로아미, 도로아미, 도로아미타불!”을 연발했다. 젊은 스님은 고구마를 한참 삶았다. 여자 스님도 얌전한 목소리로 “도로아미, 도로아미, 도로아미타불!”이라며 화답했다. 마침내 고구마가 대강 익었던지 젊은 스님은 자신의 고구마를 냄비에서 꺼내려는 눈치였다. 그러나 여자 스님도 만만치 않았다. 고구마가 푹 익으려면 아직 멀었으니 냄비에 좀 더 불을 세게 지피라는 것이었다.

역사상 성직자들의 음란은 사회적 물의를 불러 일으켰다. 서양 중세 수도원의 마루 밑에서 사생아들의 뼈가 무수히 많이 나왔다든가, 수녀원의 우물에서 영아들의 해골이 상당수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여종도, 기생도 극락으로 보내는 힘

교황 그레고리는 간음한 성직자, 첩이 있는 성직자 등이 미사를 집전해서는 안 된다며 교단 정화운동을 적극 추진했다. 그는 성직을 매매하거나 성사의 대가로 신도들에게 돈을 요구하는 일이 있어서도 절대 안 된다고 주장했다는데,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서양 중세에만 있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양반들이 들려주는 ‘고구마’ 이야기는 한국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역사 기록을 들춰 보았더니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일들이 정말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스님을 성범죄자처럼 취급하면 잘못된 일임이 분명하다.

극소수의 스님이 어쩌다 불법 본연의 가르침에서 좀 멀어져 있었다고 봐야 사리에 맞는 해석일 것이다. 아무리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비구(남자 승려)와 비구니 사이에 모종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점을 도저히 납득하지 못할 독자도 있을 법하다. 그럼 실례를 들어보겠다.

<조선왕조실록> 중 성종 4년(1473) 7월16일 기사를 보면, 여승들의 음란한 행동이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당시 사헌부 대사헌 서거정(徐居正)은 이 문제로 국왕에게 글을 올려 여승들의 비구 사찰 출입을 금하자고 요청했을 정도다.

서거정의 조사에 따르면 비구니들 가운데는 과부 출신이 적지 않았는데, 그녀들은 평소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고 했다. 그들 여승은 “사찰(寺刹)을 집으로 삼아 음란하고 방종하며 추하고 더러운 소문이 끝없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양반 가문의 과부 윤씨(尹氏)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사람이다. 그녀는 사족(士族)의 과부들을 유인해 성불사(成佛寺)·정인사(正因寺) 등 여러 절을 왕래하며 음란한 행각을 벌였다고 했다. 비구 혜사당(惠社堂)·정각(正覺) 등과는 7~8일 동안이나 동숙했다. 윤씨와 같은 비구니가 비구들과 놀아날 때는 제자들을 시켜 문(門)까지 지키게 하는 조심성을 보였다고 했다.

국왕은 비구니가 비구 사찰에 왕래할 수 없게 하자는 서거정의 요청을 일단 묵살했다. 그러나 남녀 승려들 사이에는 종교적 교류를 넘어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인간적(?) 교감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점은 호된 비판의 대상이었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입증되었다. 여승들의 난잡한 행동이 문제될 때면 늘 비구가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비구들의 성적 일탈은 좀 더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여승에 비해 처지가 나았기 때문일 것이다. 똑같이 승복을 입었다고 해도 젠더(gender)의 차이는 뚜렷했다.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여성은 억눌린 소수자였다.

남자 승려들은 절간에 속한 여종들을 건드리는 경우도 심심치 않았다. 요즘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예전에는 절에서 남자 종과 여자 종을 적지 않게 거느렸다. 15세기에 도징(道澄)과 설연(雪然)이라는 승려는 자기들 절에서 일하는 여비(女婢)를 간음한 죄로 벌을 받았다. 가휴(可休)와 성주(省珠) 역시 그랬다(세종 3년 8월5일).
앞 부분에서 ‘암말’을 희롱하는 것이 결국 약자에 대한 성적 착취를 가리킨다고 풀이해 보았다. 역사 속에서는 실제로 그런 일이 왕왕 일어났다.

어떤 스님이 있었다. 그는 글에 능할 뿐만 아니라 골계(滑稽)에도 능해 아주 유명했다. 마침 평안도에 미모가 수려하고 글도 잘 짓는 기생 하나가 있었다. 그 소문을 들은 스님은 기생을 찾아가 시를 지으며 수작을 걸었다.

“네 아름다움 참으로 고와라.
정 많은 교태가 내 마음에 들도다
어둠 속에서 널 만나면
무쇠 간장인들 어찌 아니 녹으리.”

기생은 시에 감탄한 듯 깔깔대며 스님이 무슨 수로 여인을 거느릴 수 있겠느냐고 은근히 따졌다. 스님의 답이 걸작이었다.

“내 비록 하지 않는다 해도 능숙하게 할 수 있다마다. 먼 옛날 아란존자는 부처님의 10대 제자로서 마등가라는 여인과 정을 통했구나. 네 말대로라면 아란은 스님이 아니고, 마등가는 또 여자가 아니라는 말이냐?”

마음이 동한 기생은 남녀 간의 일을 제대로 알기나 하느냐고 힐문한다.
“내가 네 옷을 벗기고 엉덩이를 두들긴 다음 그곳을 깊숙이 꿰뚫으면 바로 극락이 있노라.”

흥분한 기생은 스님과 한몸이 되어 인생의 지극한 일을 시작했다. 기생은 너무 기분이 좋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숨이 넘어갈 듯하며 하는 말이
“대사님은 나를 속이셨소. 평소 사람 살리기를 주로 하신다는 분이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죽여주시나요?”

“불법이 신통해 죽은 자를 살리나니, 사람을 죽게도 만들고 살게도 만드느니라.”
이쯤 되면 스님의 익살은 대단한 수준이다. 아니, 실은 스님의 언사를 지어낸 양반들의 해학을 더 들을 만하다. 상대가 기생이라면 일종의 매춘 행위가 되는 셈이니 누구라도 관계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일까? 그런 점도 양반들은 고려했을 법하다. 하지만 양반들이 시문에 능한 스님의 상대역을 하필 기생으로 선택한 것은 ‘수사(修辭)’의 관점이 중요했기 때문이라 본다.

문자에 밝은 스님을 옳게 상대하려면 상대편 여성도 꽤 유식해야 했다. 그러나 박학한 양반가의 규수를 스님의 짝으로 내세우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유능한 평안도 기생이 등장한 것이다.

또 석가모니의 제자인 아란존자의 결혼 사실을 들춰냄으로써 양반들은 성적 결합 자체를 금기시하는 불가의 풍습을 비판했다. 또한 스님의 입을 빌려 불자들이 소원하는 극락이라는 것도 실은 성적 오르가슴 이상이 될 수 없다고 고백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양반들은 현세적 세계관을 천명했다.

쾌락의 정점에서 나오는 말 “죽여줘요”

이 성담론의 절정은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이라는 것도 남녀 간의 성행위로 축소되어 마땅하다는 논리다. 쾌락이 정점에 달했을 때 “죽여줘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양반들의 이러한 이야기 방식은 일방통행이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한 점이 있다. 그들은 일방적으로 스님의 역할을 설정해 놓고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늘어놓았을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양반들이 펼친 언어의 유희는 결코 악의에 가득 찬 것은 아니었다. 이야기 속의 스님은 꽃다운 기생을 품에 안고 기쁨에 넘친 성행위를 즐길 수 있었으니 말이다.

때로 스님들은 양반 부녀와 운우의 정을 나누기도 했다. 이는 양측의 필요에 의해,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여인이 속한 양반가의 기대에 부응하는 셈이 되었다. 평민 집안에서도 아들을 낳아 대를 이으려고 하는데, 하물며 뼈대 있는 가문에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한국의 관습은 온 집안이 애타게 기다려도 자손이 점지되지 않으면 부녀를 깊은 산사로 보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부처님을 찾아가 백일치성을 드리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치성 끝에 옥동자를 얻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10년, 20년을 부부가 지극정성으로 노력(?)했어도 못 얻었는데 어떻게 백일 만에 씨를 내리겠는가? 더욱이 부부 합방도 없이! 기도에 지친 안방마님을 누군가가 도운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돌이나 쇠로 만들어진 부처님이 여인을 도울 수는 없는 일이다. 씨를 내려준 이는 사람일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건장한 스님 외에 따로 누가 있겠는가? 스님들은 양반사회의 멸시에도 불구하고 양반사회의 존속과 번영을 위해 자신들의 몸을 직접 희생해 가며 보시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보시 행위에 대해 양반사회는 깊이 고개 숙여 감사하기는커녕 오해와 비방이 적지 않았다. “승려들이 서울 안에 많이 모여들어 남의 처첩(妻妾)을 간음하기도 하고, 창기(倡妓)와 간통하는 등 음욕(淫慾)을 마구 행하였다”는 내용이 실록에 여러 차례 나온다(세종 12년 8월26일).

위세 등등한 양반 남편보다 내적 수양이 더 많이 된 듯하고 이해심도 많아 보이는 스님들. 그들에게 행여 자신들의 아내를 빼앗기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이 많은 양반을 부자유스럽게 만들었다. 양반들은 사실 이상으로 스님들의 남성적 능력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 가까이에 어떤 절이 있었고, 그 절에는 음흉한 스님이 살았다. 스님은 마을의 박·김·이씨와 특히 친했다. 하루는 절간에서 무슨 맛있는 음식을 많이 만들었다며 세 집안의 부인들에게 와서 가져가십사 정중히 청하였다. 세 부인이 음식을 가져가려고 하자 스님은 절간 음식을 받을 때는 반드시 부처님 앞에서 참회해야 한다며 고백을 요구했다. 만일 참회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큰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부인들이 망설이자 불상 뒤에 숨겨둔 사미승이 “너희의 간음을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어서 참회하라”고 외쳤다.

이 소리를 부처님의 음성으로 착각한 부인들은 겁이 나 혼전 성관계며 그 외에 부정한 일들을 낱낱이 고한다. 스님은 그 이야기를 이제 바깥양반들에게도 고백할 때라고 을러댄다. 부인들은 제발 그 일만은 피하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스님은 부인들을 차례로 곁방으로 데려가 마음껏 즐긴 다음 많은 시주를 얻어낸다.

바로 이 이야기에는 양반들의 공포심과 의심의 눈초리가 실려 있다. 자신들의 아내와 스님들이 간통의 혐의자로 등장한다. 양반들의 내면이 허약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아내들과 따뜻한 의사소통이 부족한 사회 현실, 나아가 그런 인간적 관계에 대한 사회적 기대 자체가 부재했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남녀 사이 안전지대는 없어

놀랄 일만은 아니다. 이른바 서양 근대 사회에서도 부부관계는 그처럼 삭막한 것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예컨대 18세기 미국의 대규모 농장주들은 자기들의 인문적 교양을 쌓는 데는 열심이었으나, 배우자와의 인격적 교감이나 진실한 사랑 따위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그들은 과연 배우자와의 사회적 역할분담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을까? 동시대의 남성들은 배우자에게서 충족되지 못한 감정적 욕구를 기생이나 첩과 같은 대상을 통해 해결했다. 당시 그것은 합법적인 대리만족이었다. 그렇다면 대리만족이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었던 전근대 시기 기혼 여성들의 처지는 무척 비참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성들은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접촉이 허용되었던 스님들에게 많은 기대를 하게 되었다. 자칫하면 그들의 관계는 과열되었다. “중의 무리들이 부인을 유인(誘引)해 산중의 절에 감추고, 혹은 머리를 깎아 여승을 만들어 동행(同行)이라고 모칭(冒稱)하고 남몰래 서로 음란한 짓을 하는 자”가 있다는 역사상의 고발은 이 같은 사회 현실을 반영한다(성종 3년 7월10일).

또, 양반들이 자기들의 아내와 스님들의 관계를 지나치게 의심한 것도 실은 다 이런 역사적 경험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성직자와 여성들의 ‘탈선’은 고전적 테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마찬가지고, 고대·중세는 물론 오늘날에도 별로 다름이 없다.

일본 중세에도 꽤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한다. 먼 옛날 일본의 어느 시골에 부부가 살았는데 남편이 여러 날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때마침 한 수도승이 와서 불경을 읽어주고 탁발을 청했다. 부인은 남편을 위한 마음에서 스님과 함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기도를 했다.

그런데 스님은 부인이 젊고 순진한 것을 알아차리고 겁탈을 자행했다. 바로 그때 남편이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 수풀 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눈치를 챘다. 그는 사슴인 줄 알고 화살을 쏘았는데 스님의 등에 명중했다(今昔物語集).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우리가 검토한 것과는 다른 방향에서 스님의 탈선 문제를 조명한다. 제아무리 수행에 정진하는 스님이라도 솟구쳐 오르는 정욕 때문에 계율을 범할 수 있고, 그 때문에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여성의 경우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순진한 마음만 믿고 스님을 가까이하다가는 큰일을 당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정리하면,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쓴다면 비극이 기다릴 뿐이라는 것이다.

성과 속으로 분리된 두 세계의 남녀가 만나면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쉽다. 그 점에서 성역이 따로 없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흔히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네 엄마, 저기 저 절의 중이 업어갔다”는 말이다. 어른 말을 잘 안 듣는 애들을 어른들이 골리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이 말을 믿지 않고 까불다가도 몇 번 되풀이하다 보면 으레 어린아이는 겁이 나 엉엉 울고는 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스님은 못난 남편들에게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에게도 잠재적 공포의 대상이었다.

조선사회의 최고위층 여성 중에도 스님과의 스캔들로 일순간 사회의 밑바닥으로 추락한 인물이 있다. 15세기 종실 중에 오성정(梧城正) 이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불행히 일찍 죽었다. 그의 아내 정씨(鄭氏)는 판사(判事) 정지담(鄭之澹)의 딸로 어려서부터 매우 유복한 사람이었으나 갑자기 과부가 되어 불행해졌다. 정씨는 망부(亡夫)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많은 재물을 써 열심히 불공을 드렸다. 자연히 그 집에는 스님들의 출입이 빈번했다.

정씨는 당대의 고승으로 알려진 설준(雪峻)을 비롯해 심명(心明)·해초(海超) 등과 번갈아 사통하기에 이른다. 그들의 만남은 상당히 잦았던지 정씨는 아이를 두 번이나 가졌다. 세상 인심이 두려웠던 정씨는 남몰래 시골로 내려가 아이를 낳고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그러나 비밀은 새나갔고, 어떤 양반이 시(詩)를 지어 그를 비난했다. 얼마 뒤 온 장안에 그 시가 유행했다.(세조 14년 1월7일)

“오성정의 아내 정부인은
남몰래 탁발한 이와 간통해
작은 중을 낳았도다
장안의 화류객들에게 묻노니
어찌하여 오가며 인연을 맺지 않는가?”

자연적이고 강렬한 인간의 욕망

정씨의 추락담은 앞서 예로 든 일본 설화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불심이 깊었던 과부가 죽은 남편을 위해 불공을 드리다 처음에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구렁텅이에 빠져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다. 정씨 집안을 자주 출입하다 간음죄에 빠지게 된 설준 스님 등도 처지는 마찬가지다. 만남의 동기는 종교적으로 선했으나 종국에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도로아미타불”이라는 조소를 면치 못했다.

극락·천당·불로장생 등으로 표현되는 종교적 구원의 세계를 향해 우리는 깃발을 흔들 때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 깃발은 육체의 더욱 근원적 욕망 앞에 꺾이기 쉬운, 이를테면 갈대 같은 것이다. 갓 쓴 양반들은 종교적 구원에 대해서는 비교적 무지했던 것 같지만,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자연적이고 따라서 강렬한 것인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욕망에 관한 그들의 인식은 때로 그들을 너그럽고 자유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좀 더 많은 시간을 그들은 욕망의 위력 앞에 좌절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인간의 본원적 욕망에 대해 노골적인 공포심과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양반들의 이런 태도야말로 사실은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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