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 상점 턴 상습범 잡고보니···"약 먹으려고" 60대 장발장

중앙일보

입력 2021.04.04 05:00

형사들 쓰레기 쌓인 집 청소 왜?

지난달 29일 강원 춘천시 후평동의 한 아파트 대청소에 나선 춘천경찰서 생활범죄수사팀 소속 형사들. 박진호 기자

지난달 29일 강원 춘천시 후평동의 한 아파트 대청소에 나선 춘천경찰서 생활범죄수사팀 소속 형사들. 박진호 기자

지난달 29일 오전 강원 춘천시 후평동의 한 아파트. 마스크와 장갑을 낀 형사들이 악취가 진동하는 화장실을 청소하고 시꺼먼 때가 가득한 매트리스를 들어 집 밖으로 내놨다. 춘천경찰서 생활범죄수사팀 소속 형사들이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집을 대청소하는 현장이었다. 형사들이 대청소에 동참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지난달 2일 오전 9시30분쯤 춘천시 후평동의 한 무인상점.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는 60대 남성이 상점 안으로 들어가더니 과자와 캔커피를 자신이 가져온 종이 가방에 넣었다. 물건을 담고 2분가량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남성은 계산하지 않고 그대로 상점을 나섰다. 그가 이날 계산을 하지 않고 가져간 과자와 커피는 9000원어치. 이 남성은 지난 2월 2일 오전 10시쯤에도 같은 상점에서 삶은 계란 4개와 캔커피 등을 같은 방법으로 훔쳤다.

여러 차례 정산이 맞지 않자 폐쇄회로TV(CCTV)를 돌려보던 상점 주인은 이 남성을 경찰에 신고했다. 수사에 나선 생활범죄수사팀은 지난달 17일 A씨(64)를 절도 혐의로 인근 아파트에서 검거했다. 경찰 조사 결과 이 남성은 지난해 12월 3일부터 지난달 11일까지 총 10차례에 걸쳐 과자와 음료수 등을 훔친 것으로 드러났다.

열흘에 한 번꼴로 과자 등 훔쳐 

지난달 29일 강원 춘천시 후평동의 한 아파트 대청소에 나선 후평1동행정복지센터 직원이 종량제 봉투를 묶고 있는 모습. 박진호 기자

지난달 29일 강원 춘천시 후평동의 한 아파트 대청소에 나선 후평1동행정복지센터 직원이 종량제 봉투를 묶고 있는 모습. 박진호 기자

지난달 29일 강원 춘천시 후평동의 한 아파트 대청소에 나선 춘천경찰서 생활범죄수사팀 소속 형사들. 박진호 기자

지난달 29일 강원 춘천시 후평동의 한 아파트 대청소에 나선 춘천경찰서 생활범죄수사팀 소속 형사들. 박진호 기자

그렇다면 이 남성은 왜 무인상점에서 계란과 과자 등을 훔친 걸까. 자영업을 하던 A씨는 2017년 10월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치료비로 전 재산인 4000만원을 모두 썼다. 치료 후에는 균형 감각이 떨어지고 판단력도 흐려졌다. 병원을 나온 A씨는 생계유지를 위해 아파트 경비원 등 여러 곳에 이력서를 넣었다. 하지만 몸이 불편한 탓에 가는 곳마다 ‘집에 가 계시면 연락드릴게요’라는 말만 들었을 뿐 연락이 오는 곳은 없었다. 지역 일자리센터에도 가보고 공공근로를 하려고 알아봤지만 65세가 넘지 않아 일할 수 없었다.

가진 돈이 모두 떨어지고 생계를 이어가기도 어려워지자 2019년 1월 어렵게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이후 매달 생계비와 주거비 명목으로 60~70만원이 지원됐지만 평범하게 지내긴 어려웠다. 월세 35만원을 내고 관리비와 난방비 등을 내고 나면 늘 돈이 부족했다. 어떤 때는 먹을 것이 없어 3일을 굶기도 했다. 경찰 조사에서 A씨는 “심혈관질환을 앓고 있어 약을 꾸준히 먹어야 하는데 빈속에 먹을 수 없어 잘못된 행동인 줄 알면서도 무인상점에서 계란과 과자 등을 훔쳤다”고 진술했다.

조관형 춘천경찰서 생활범죄수사팀장은 “A씨를 검거하기 위해 집을 찾아갔는데 집이 너무 지저분한 데다 사정도 딱해 직원들과 십시일반 돈을 모아 산 라면 2박스를 전달하고 대청소도 하기로 결정했다”며 “A씨가 범행 사실을 모두 시인하고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지속해서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후평1동사회보장협의체 우연히 같은 날 대청소

춘천시 후평1동행정복지센터 직원과 후평1동사회복지협의체 위원, 춘천경찰서 생활범죄수사팀 소속 형사의 대청소로 깨끗해진 집. [사진 후평1동행정복지센터]

춘천시 후평1동행정복지센터 직원과 후평1동사회복지협의체 위원, 춘천경찰서 생활범죄수사팀 소속 형사의 대청소로 깨끗해진 집. [사진 후평1동행정복지센터]

춘천시 후평1동행정복지센터 직원과 후평1동사회복지협의체 위원, 춘천경찰서 생활범죄수사팀 소속 형사의 대청소로 깨끗해진 화장실. [사진 후평1동행정복지센터]

춘천시 후평1동행정복지센터 직원과 후평1동사회복지협의체 위원, 춘천경찰서 생활범죄수사팀 소속 형사의 대청소로 깨끗해진 화장실. [사진 후평1동행정복지센터]

한편 이날 대청소엔 경찰 말고도 춘천시 후평1동행정복지센터 직원들과 후평1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들이 참여했다. 이들 역시 집을 방문했던 통장의 제보로 A씨를 돕기 위해 대청소에 나섰다고 한다.

정순의 후평1동장은 “어려운 이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후평1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들과 대청소에 나섰는데 우연히 경찰관들과 날이 겹쳤다”며 “A씨의 몸이 불편한 점을 고려해 가사지원 서비스를 연결하고 65세가 넘는 시기부터 노인 장기요양서비스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고 말했다.

춘천=박진호 기자 park.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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