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카라쿠배’ IT 개발자 모시기 경쟁, 1억 스톡옵션도

중앙선데이

입력 2021.04.03 00:20

지면보기

730호 13면

“○○님, 잠시 얘기 괜찮을까요?” 경기도 판교의 정보기술(IT) 기업에 다니는 시니어 개발자 A씨는 요즘 한 주에 2~3번꼴로 팀원으로부터 개인 면담 신청을 받는다. 처음엔 갑작스러웠지만 몇 주 비슷한 경험을 했더니 이젠 ‘또 이직한다는 얘기구나’라는 생각부터 든다. A씨는 “돌려 말할 것 없이 어디 가느냐고 바로 물으면 어디로 이직한다는 답변이 돌아온다”며 “연봉 대폭 인상 등을 조건으로 내건 경쟁사들의 ‘개발자 모시기’ 경쟁이 치열해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한 대책 마련도 시급해졌다”고 말했다.

SW 분야 인력난 속 몸값 상승
온라인 게임 등 언택트 정착 영향
AI 등 신기술 부분만 3만 명 부족

쿠팡·크래프톤 초봉 6000만원
중소·대기업 부익부빈익빈 우려

이번 여름에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는 취업준비생 B씨도 “대부분이 ‘네카라쿠배’ 입사를 우선 희망하고 있다”며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네카라쿠배는 네이버·카카오·라인플러스·쿠팡·배달의민족(우아한형제들) 등 국내 유명 IT 기업 5곳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프로그래밍을 공부한 예비 개발자 취업준비생들이 최근 주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가고 싶은 기업을 이렇게 묶어 부르는 데서 유래했다. B씨는 “네카라쿠배는 신입 개발자들에게도 화끈한 처우를 약속하고 있다”며 “예전 선배들은 삼성전자·LG전자 입사를 선호했다지만 우리 세대는 이쪽이 더 좋다”고 덧붙였다.

IT 업계가 소프트웨어(SW) 개발자 구인난에 몸이 달으면서 ‘귀하신 몸’ 개발자와 예비 개발자들이 들썩이고 있다. 최근 네이버와 넥슨은 각각 연내에 사상 최대 규모로 개발자를 채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네이버는 약 900명, 넥슨은 수백명). 우수 인재 조기 확보를 위한 ‘당근’ 제시도 잇따르고 있다. 카카오커머스는 신입 개발자에게 1억원 상당 스톡옵션을 제공하기로 했다. 리디북스 등을 보유한 콘텐트 업체 리디는 신입 개발자에게 초봉 5000만원을 적용키로 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앞서 쿠팡이 지난 2월 개발자 초봉 6000만원 시대를 열면서 게임 업체 크래프톤이 개발자 초봉 6000만원에 동참했고, 엔씨소프트(5500만원)와 넥슨(5000만원) 등도 기존보다 개발자 초봉을 대폭 올렸다. 네이버도 개발자 초봉을 5000만원으로 맞추고 있다. 이러다 보니 프로그래밍을 전공한 취준생 사이에선 “이제 삼성전자 입사는 후순위”란 반응까지 나온다. 삼성전자의 대졸 신입사원 초봉은 4500만원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국내 대기업들의 대졸 신입 사무직 평균 초봉은 3347만원이었다.

이른바 네카라쿠배 등을 중심으로 경쟁사나 이웃 업계의 개발자를 데려오려는 경쟁도 치열해지다 보니 기존 개발자 처우도 대폭 개선됐다. 엔씨소프트는 모든 기존 개발자 연봉을 1300만원, 크래프톤은 2000만원 각각 인상했다. 기업들의 이런 인재 유치 경쟁과 도미노 연봉 인상은 최근 IT 시장에서 개발자 수요가 급증한 반면, 공급은 부족한 현상이 심화된 것과 관련이 깊다. 시장 조사 업체 KRG에 따르면 2017년 21조4500억원이었던 국내 IT 시장(통신·개인용 IT를 제외한 기업용 IT 시장) 규모는 지난해 22조7300억원으로 커졌고, 올해 이보다 4.7% 증가한 23조80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이에 비해 SW 분야 인력난은 두드러지고 있다.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에 따르면 2018~2022년 인공지능과 클라우드, 빅데이터, 증강현실(AR)·가상현실(VR) 등 핵심 신기술 분야에서만 3만 명 이상이 더 필요할 정도로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고 있다. 여기에 커넥티드카 등 과거 없던 사물인터넷(IoT) 기반의 제조업 수요 급증, 배달의민족 등 온·오프라인 연계(O2O) 비즈니스의 급성장까지 더해지면서 개발자 몸값도 ‘금값’이 됐다. 한 개발자는 “중소 공기청정기 제조사마저 개발자가 필요한 시대가 됐다”며 “거의 모든 제품에 모바일과 네트워크로 원격 제어하는 기술 접목이 필수가 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언택트(비대면) 사회가 형성된 것도 개발자 수급 불균형에 불을 붙였다. 대표적 사례가 온라인 게임의 신규 이용자 대거 유입이다. 이종혁 광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코로나19 사태 이전엔 마니아 위주로 게임을 즐겼다면 지금은 집안에 있는 시간이 늘어난, 더 많은 사람들이 각종 온라인 게임에 접속해 다른 이용자들과 소통하면서 오프라인 만남의 대리만족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웹툰과 웹소설 등 창작자 외에 개발자 손길이 필요한 IT 콘텐트 역시 코로나19 여파로 시장 규모가 더 급격히 커졌다.

개발자 몸값 상승은 의사 표현에 적극적인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90년대 중반~2000년대 초 태어난 Z세대)가 기업들의 구인 시장 중추로 부상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한 IT 업체 인사담당자는 “이들이 ‘블라인드(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 익명으로 ‘다른 회사는 연봉 올려준다는데 우리는 왜 예외냐’고 글을 올려 문제 제기 여론이 조성되고, 언론을 통해 확산되면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달라진 산업 트렌드에 소비 트렌드까지 더해져 개발자 인력난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자금력이 부족한 스타트업 등 중소 IT 업체들은 어렵게 키운 개발자를 대기업에 쉽게 넘겨주는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될 우려도 커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경영 여건이 빠듯한 IT 회사들은 처우 개선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못 나서고 있다”며 “직원들도 그림의 떡처럼 대기업의 개발자 연봉 인상을 보고 있다”고 전했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