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롤린’…힘든 세월 버텨온 대중들 공감

중앙선데이

입력 2021.04.03 00:02

업데이트 2021.04.03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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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호 02면

[SUNDAY 진단] ‘역주행송’의 사회학

‘역주행송’과 관련 있는 가수들. 왼쪽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EXID, 양희은, 박인희, 김광석, 양준일, 전인권, 비. 디자인=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중앙포토]

‘역주행송’과 관련 있는 가수들. 왼쪽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EXID, 양희은, 박인희, 김광석, 양준일, 전인권, 비. 디자인=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중앙포토]

“내 노래는 꼭 7년쯤 지나야 뜨더라고.” 가수 양희은의 말이다. 1985년 발표된 ‘한계령’은 92년쯤 돼서야 많은 사람이 좋아하기 시작했고, 91년 발표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는 97년 MBC 베스트극장 ‘사랑한다면 그녀처럼’에 삽입된 후에야 인기를 얻었다. 지금은 양희은의 대표곡으로 꼽히고 수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할 정도의 노래지만, 정작 발표 땐 썰렁했다.

양희은 ‘한계령’ 등 뒤늦게 히트
“내 노래는 7년쯤 지나야 뜨더라”

김광석 ‘이등병의 편지’ 등
선배들 노래 다시 불러 대박 나

양준일 ‘리베카’ 인터넷 덕 부활
‘롤린’ 집단적 경험 군인들 지지

브레이브걸스의 예상치 못한 인기로 연일 ‘역주행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사실 ‘역주행송’이란 말만 없었을 뿐, 세월을 거스르듯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인기를 얻는 노래들은 어느 시대나 있었다. 양희은 노래처럼 그 가수의 원곡 버전이 역주행하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흔한 경우는 후배 가수가 다시 불러 인기를 얻는 경우다.

김광석의 음반 ‘다시 부르기’에 수록된 ‘이등병의 편지’,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그녀가 처음 울던 날’ 등은 모두 가깝게는 5년, 멀게는 20여 년 전에 전인권, 양병집, 이정선이 이미 발표한 노래였다. 송창식의 ‘담배가게 아가씨’(1987)도 윤도현의 99년 음반 ‘한국 록 다시 부르기’를 통해 널리 알려진 역주행송이다.

영화나 드라마 삽입곡으로 다시 뜨기도

이토록 좋은 노래가 왜 그땐 인기를 얻지 못했을까. 대중문화의 속성상 당대 인기 트렌드를 벗어난 작품이 히트하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다. 그렇게 발표 때 ‘망했던’ 작품이 몇 년 후 우연히 드라마 삽입곡이 되거나, 혹은 그 노래의 가치를 기억한 걸출한 후배 가수의 리메이크에 의해 겨우 부활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아주 운 좋은’ 소수에 해당한다. 정말 많은 좋은 노래가, 그저 가요 ‘시장’의 물결에 휩쓸린 채 떠내려가 버린다.

양준일의 ‘리베카’나 비의 ‘깡’은, 늘 존재했던 역주행 현상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 환경에서 나타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방송사 직원들이나 찾아볼 수 있었던 수많은 옛날 동영상과 음원들을 이제 일반인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역주행송들이 수시로 생겨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후배 가수의 ‘다시 부르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수용자의 ‘다시 보기’를 통해서다. 물론, 비웃으며 보다가 ‘1일 3깡’ 하게 되는 ‘깡’과,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간 감각이 이제야 자기 세상을 만난 듯한 ‘리베카’의 차이는 크긴 하지만 말이다.

양준일 붐은 시대를 앞서간 감각 때문에 뜨지 못했던 노래를 재발견했다는 것 말고도 한 가지의 인기 요인이 더 있었다. 재능 있는 예술인을 그토록 홀대하여 좌절시킨 한국 사회의 몰지각함과 폭력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미안하고 안타까워했으며, 재능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채 반백 살이 된 불운한 삶을 기어이 이겨내 훌륭하게 살아내고 있는 모습을 보며 호감과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브레이브걸스 붐도 그들의 태도와 인성에 대한 감복과 힘든 세월을 버텨온 데에 대한 공감이 중요한 요인이다. 그런데 이번엔 한 가지 요인이 또 더해졌다. 바로 브레이브걸스 노래의 수용 경험이다. 먼지 나는 연병장과 지긋지긋한 뻘밭에서 구르던, 그 고생스러웠던 시절을 함께 했다는 집단적 수용 경험을 ‘롤린’은 건드려주었다. 마흔이 넘어서도 군대 다시 가는 악몽을 꾸는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그 힘든 삶의 한복판에서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며 목이 터지게 불렀던 그 노래는 가요 시장의 인기와 무관하게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노래의 주인은 창작자와 가수만이 아니라, 그걸 향유하는 수용자 대중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실 문화사적으로 보건대, 시대를 거슬러 끈질기게 살아남고 부활하는 진짜 드라마틱한 역주행송들은 대개 가요시장 바깥을 경유한 경우다. 한때 대중가요였으나 더 이상 상품으로서 이윤성을 갖지 못해서 ‘바깥’으로 밀려난 노래들, 그러나 그걸 즐겼던 수용자 대중의 귀와 입에서 맴돌며 구전에 구전을 거듭하며 수십 년 살아남는 노래들이 정말 많다. 어떤 노래는 원곡의 흔적이 거의 사라질 정도로 구전가요가 돼버리고, 또 어떤 노래는 그 구전가요 버전이 다시 음반으로 취입되며 극적으로 부활하기도 한다.

‘바깥’서 구전되다 역주행도

2017년 발표한 ‘롤린’의 뒤늦은 인기로 역주행 신화를 쓰고 있는 걸그룹 ‘브레이브걸스’. [중앙포토]

2017년 발표한 ‘롤린’의 뒤늦은 인기로 역주행 신화를 쓰고 있는 걸그룹 ‘브레이브걸스’. [중앙포토]

예컨대, 87년 말 들국화가 취입한 ‘사노라면’은 60년대 후반 쟈니리의 노래인데, 구전의 과정을 거쳐 재취입된 경우다(그래픽 참조). 이제는 박인희의 70년대 버전만 기억하는 ‘세월이 가면’ 역시 박인환 시인의 말년인 56년 방송인 이진섭이 작곡하고 테너 임만섭이 명동 막걸리집에서 처음 부른 노래로, 56년 나애심에 의해 취입됐다. 그 후 계수남, 현인이 부르기도 했지만 주로 지식인들 술자리에서 구전되다가, 70년대 박인희가 낭송을 섞어 부른 버전으로 역주행송이 됐다. 그뿐이랴. 신신애의 ‘세상은 요지경’은 30년대 말 김정구가 부른 ‘세상은 요지경’과 ‘앵화폭풍’ 두 곡이 구전 과정에서 뒤섞이고 대폭 변형된 형태로 93년에 대박을 터뜨린 경우다.

이 곡들은 구전 과정을 거쳐 다시 대중가요 시장에 들어온 경우려니와, 그저 입에서 입으로 수십 년 사랑받다가 시나브로 잊힌 노래들은 부지기수다. 그 노래들이 가요시장 바깥에서 구전되면서 얼마나 많은 대중의 인생들과 뒤엉켰을까.

학교와 군대와 고아원처럼, 살 부딪치며 긴 인고의 시간을 함께 보내야 했던 곳에서 유독 이런 구전의 노래들이 많이 이어졌다. 그러면서 가요시장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풍성하고 깊은 맛을 풍기는 완전히 새로운 노래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니 브레이브걸스 ‘롤린’의 진짜 주인은 다름 아닌, 까까머리 군복 차림으로 엉덩이와 머리를 양옆으로 흔들어대던 이들이다.

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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