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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의 식사빵, 아트가 된 디저트 찾아 ‘빵지순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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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호 15면

MZ세대는 ‘밥심 대신 빵심’

1946년 문을 연 ‘태극당’의 장충동 본점에는 언제나 남녀노소 손님들로 북적인다.

1946년 문을 연 ‘태극당’의 장충동 본점에는 언제나 남녀노소 손님들로 북적인다.

영화 ‘카모메 식당’은 핀란드에 오픈한 작은 일식당을 중심으로 일본 여성 3인이 우정을 쌓는 이야기다. 낯선 이방인이었던 이들이 현지 주민들과 소통하게 된 계기는 ‘시나몬 롤’을 구우면서부터다. 고소한 빵 냄새와 함께 독특한 계피향이 마을에 퍼지자 그동안 뚱한 얼굴로 창문 밖을 서성였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식당 문턱을 넘기 시작한다.

아침·점심·저녁 세 끼 모두 빵빵빵 #“빵 냄새가 꽃 냄새보다 좋다” 실감 #독특한 모양·맛으로 ‘소확행’ 충족 #홈베이킹족도 늘어 와플팬 불티

소설가 김영하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미국에선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있을 때 미리 빵을 구워 놓는다. 오븐에서 빵 냄새가 나면 집이 팔릴 확률이 높아진다. 따뜻한 가정의 느낌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국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는 자신의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언제라도 빵 냄새가 꽃 냄새보다 좋았다”고 적은 바 있다.

베이커리 매장 판매량 크게 늘어나

젊은 층에서 식사빵으로 인기가 좋은 ‘밀도’의 식빵.

젊은 층에서 식사빵으로 인기가 좋은 ‘밀도’의 식빵.

사람들을 무장해제시키는 빵 냄새는 표면의 크러스트와 속살인 크럼 냄새의 이중주로 만들어진다. 가볍게 탄 크러스트에서 달콤한 냄새가 폴폴 올라오면서 먼저 식욕을 돋우면, 두 손으로 빵을 쥐고 갈랐을 때 드러나는 말랑말랑 속살(크럼)이 구수하면서도 신 듯한 이스트 냄새로 침샘을 자극한다.

빵 냄새 나는 골목, 빵 냄새 나는 집.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이 풍경이 요즘 대한민국 골목마다 집집마다 벌어지고 있다. 중년 이후의 세대가 ‘밥심’으로 살았다면, 요즘 한국의 MZ세대는 ‘빵심’으로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저녁엔 식사빵, 점심엔 디저트 빵을 즐기는 풍경이 자연스럽다.

젊은 층에서 식사빵으로 인기가 좋은 ‘밀도’의 큐브 커스터드.

젊은 층에서 식사빵으로 인기가 좋은 ‘밀도’의 큐브 커스터드.

‘식사빵’이란 밥을 대신할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식빵·바게트·모닝롤·베이글·치아바타·깜빠뉴 등이 여기에 속한다. 신세계푸드에 따르면 이마트 내에서 운영하고 있는 베이커리 매장 ‘E-베이커리’의 1~2월 모닝롤·식빵·크루아상·베이글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35% 증가했다. 먹거리 새벽배송업체인 마켓컬리에서도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이 통밀 빵의 경우 300%, 바게트가 100%, 스콘이 91%, 치아바타가 67% 증가했다.

담백 한 기본빵을 컨셉트로 새로 문을 연 ‘쉐즈알렉스’의 깜빠뉴.

담백 한 기본빵을 컨셉트로 새로 문을 연 ‘쉐즈알렉스’의 깜빠뉴.

업계에서 ‘빵요정’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김혜준 푸드 콘텐트 디렉터는 “코로나19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삼시세끼 중 한 끼는 식사빵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늘었다”며 “식사빵은 맛이 담백해서 그것 하나만 먹어도 좋고, 다른 음식들과 곁들여 먹어도 좋기 때문에 인기가 많다”고 했다. 김 디렉터는 또 “밀가루·물·효모·소금만으로 만드는 게 식사빵의 기본인데, 이게 사실 잘 만들기가 굉장히 어렵다”며 “때문에 어설프게 집에서 만들기보다 ‘식부관’ ‘바게트K’ 등 소문난 식사빵 전문점을 찾아가 사 먹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덧붙였다.

담백 한 기본빵을 컨셉트로 새로 문을 연 ‘쉐즈알렉스’의 크루아상.

담백 한 기본빵을 컨셉트로 새로 문을 연 ‘쉐즈알렉스’의 크루아상.

주말이면 유명 식사빵 전문점 앞에 길게 줄이 늘어서는 건 요즘 흔한 풍경이다.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빵집 ‘밀도(meal°)’ 1호점은 2015년 문을 열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 서는 빵집’으로 인기다. 상호명은 식사·끼니를 뜻하는 영어 ‘밀(meal)’과 식빵의 기본재료인 ‘밀’에 온도·습도의 ‘도’를 더한 것. 그만큼 세심한 정성으로 빵을 굽겠다는 표현인데, 밀도의 식빵과 스콘은 담백하고 쫄깃하기로 유명하다.

얼마 전 삼성동에 문을 연 레스토랑 ‘쉐즈 알렉스’ 지하에는 동명의 빵집이 있다. ‘알렉스 더 커피’ 이주환 대표와 성수동의 샌드위치 전문점 ‘큐물러스’ 진유식 셰프가 공동 운영하는 곳이다. 이 대표는 “레스토랑을 새로 준비하면서 식사 후 사람들이 들러 커피를 즐길 함께 구매하기 좋은 상품을 고민하다 요즘 식사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을 보고 ‘커피&식사빵’을 컨셉트로 정했다”고 했다. 프렌치 요리와 곁들이기 좋은 빵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레스토랑 셰프들도 적극 환영했다고 한다.

재료 숫자가 적고 방법이 단순할수록 제대로 된 맛을 내기가 어렵다. 베이커들이 저마다 밀가 루·소금·이스트를 선택하는 데  까다로운 이유다. 쉐즈 알렉스의 서진원 베이커는 “여러 종류의 밀가루를 섞어 쓰는 방법을 고민했다”며 “영양소가 풍부하고 구웠을 때 구수한 풍미가 좋은 프랑스 밀가루, 단백질 함량이 많고 빵이 잘 부풀어 오르는 미국·캐나다 밀가루 등 3~5개의 밀가루를 섞어 다른 곳에는 없는 반죽을 만든다”고 했다.

1982년 문을 연 김영모 제과점은 지점이 6개다. 사진은 지난해 성남에 오픈한 ‘파네트리 김영모’. [사진 각 브랜드, 인스타그램]

1982년 문을 연 김영모 제과점은 지점이 6개다. 사진은 지난해 성남에 오픈한 ‘파네트리 김영모’. [사진 각 브랜드, 인스타그램]

지난 2월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 인근에 디저트 빵집 ‘누데이크’가 문을 열었다. ‘패션과 예술의 만남’을 컨셉트로 하는 안경·선글라스 브랜드 ‘젠틀 몬스터’의 자매 브랜드 중 하나인데, 케이크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피크 케이크(peak cake)’. 뾰족뾰족하게 생긴 빵들이 말차 크림을 둘러싼 모양인데, 마치 호수를 품은 산봉우리 같다. 먹는 방법도 특이하다. 봉우리 중 하나인 빵을 손으로 뜯어내면 둑이 터진 듯 가운데 고여 있던 말차 크림이 흘러나온다. 이때 빵을 크림에 찍어먹는다. 누데이크의 이재연 브랜딩 팀장은 “‘꿈을 실현시키는 판타지’가 슬로건”이라며 “소비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고, 대체할 수 없는 디저트 브랜드를 만드는 게 컨셉트”라고 설명했다. 안경·선글라스 매장이면서 제품보다는 갤러리를 방불케 하는 미술품 전시로 더 유명한 젠틀 몬스터가 ‘패션과 예술에서 영감을 얻는 디저트’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것이다.

패션과 예술에서 영감을 얻는 ‘누데이크’의 피크 케이크. 모두 독특한 모양이다.

패션과 예술에서 영감을 얻는 ‘누데이크’의 피크 케이크. 모두 독특한 모양이다.

김혜준 디렉터는 “외국 경험이 많아진 MZ세대의 미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국내 디저트 시장도 한층 화려해지고 있다”며 “‘허니비케이크’ ‘리틀앤머치’ ‘메종엠오’ 등에서 판매하는 디저트들은 개성 있는 모양과 맛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만족시키는 최고의 사치품으로 자리 잡았다”고 전했다.

패션과 예술에서 영감을 얻는 ‘누데이크’의 트로피 케이크. 모두 독특한 모양이다.

패션과 예술에서 영감을 얻는 ‘누데이크’의 트로피 케이크. 모두 독특한 모양이다.

프랑스의 ‘르꼬르동블루’를 비롯해 유명 요리학교에서 유학한 젊은 친구들이 코로나19로 귀국해 케이크 집을 차린 경우가 많아진 것도 눈길 끄는 디저트가 증가한 이유 중 하나다. 이들은 소자본으로 케이크를 구울 수 있는 작은 공간만 차려놓고 온라인으로 주문·배송하는 시스템을 활용한다. 덕분에 소비자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당일 배송을 활용해 유명 디저트를 손쉽게 맛볼 수 있다.

패션과 예술에서 영감을 얻는 ‘누데이크’의 양 모양 빵의 단면. 모두 독특한 모양이다.

패션과 예술에서 영감을 얻는 ‘누데이크’의 양 모양 빵의 단면. 모두 독특한 모양이다.

‘홈베이킹’족도 늘고 있다. 11번가가 작년 10월부터 최근 6개월간 홈베이킹 관련 상품 판매 추이를 집계한 결과를 보면, 빵칼·짤주머니·쿠킹타이머·모양틀 등이 고루 증가했다. 특히 와플팬은 6개월 전보다 거래액이 78% 늘었고, 생지(밀가루 반죽)는 131% 늘었다. ‘크로플’의 인기가 주요인이다. 생지를 말아 크루아상 빵을 굽고, 이걸 다시 와플팬에 넣고 구우면 크로플이다. 이 위에 아이스크림·생크림·과일·꿀·초콜릿 등으로 장식하는 게 인기다. 식사빵에 비해 디저트 빵은 비교적 만들기 쉽고 그 위를 다양한 토핑으로 장식해 맛과 모양을 창조할 수 있어서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다.

40년 넘은 전통 제과점도 즐겨 찾아

‘허니비케이크’에서 만든 디저트 케이크.

‘허니비케이크’에서 만든 디저트 케이크.

지난 2월 문을 연 ‘더 현대 서울’은 지하 두 개 층에 마련된 식품관 때문에 연일 손님들로 북적댄다. ‘장안의 맛있다는 집은 다 불러모았다’는 말이 돌 만큼 유명 맛집들이 들어섰고 빵집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태극당’ ‘폴앤폴리나’ ‘리치몬드 과자점’ 등 전통을 자랑하는 오래된 빵집들이 눈에 띈다.

태극당은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모나카와 사라다빵이 최고 인기 상품인데,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들은 대부분 2030 젊은 세대다. 1979년 권상범 명장이 오픈한 리치몬드 과자점은 ‘밤 식빵’의 원조로 유명하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이곳의 대표 제품은 공주밤파이·밤식빵·슈크림이며, 역시나 젊은 세대가 즐겨 찾는다. 82년 서초동에서 6평 규모로 시작한 ‘김영모 제과점’ 본점 역시 줄 세우는 풍경이 익숙하다.

복고(Retro)를 새롭게(New) 즐기는 경향이라는 의미의 신조어 ‘뉴트로’, 할매 입맛과 밀레니얼 세대를 합친 신조어 ‘할메니얼’은 식품 업계에서 MZ세대를 타깃으로 한 주요 홍보·마케팅 용어들이다. 자신들의 나이보다 긴 역사를 가진 오래된 빵집에서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맛을 즐기기 위해 기꺼이 ‘빵지순례’를 떠나는 게 요즘 MZ세대의 취향이다.

서정민 기자/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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