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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시스터즈’와 결성한 트리오, TBC PD가 “됐어” 퇴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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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호 16면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6〉  ‘알바’하다 미8군까지

1965년 내한공연한 미국 가수 냇 킹 콜. 맨 왼쪽이 위키 리. 냇 킹 콜 오른쪽이 최희준. 맨 오른쪽이 가수 유주용. [사진 성승모, 중앙포토]

1965년 내한공연한 미국 가수 냇 킹 콜. 맨 왼쪽이 위키 리. 냇 킹 콜 오른쪽이 최희준. 맨 오른쪽이 가수 유주용. [사진 성승모, 중앙포토]

내가 27년 전인 1994년 고려원에서 발간한 나의 자전적 소설 『놀멘 놀멘』 238쪽에는 이런 대목이 실려 있다.

미군 교회서 ‘하청 성가대’ 첫 알바 #명동 ‘오비스 캐빈’ 카페서 노래도 #미8군 쇼단엔 최희준·현미·패티 김… #이백천 통해 오디션, 심사위원 울려 #미 팝송 우리말로 부르는 게 유행 #‘고철’ 예명으로 팝 번안곡 30곡 써

“만일 누군가 나에게 젊은 날 비타민 역할을 해준 사람이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오태석과 이백천 두 사람을 댈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그랬다. 학교에선 오태석, 쎄시봉에선 똘강 이백천. 웃기는 건 오태석이 음악선생이 아니고 한갓 동아리 연극 코치였다는 거다.

나는 서울음대에 입학하자마자 교내 연극 동아리에 들어간다. 우리는 첫 작품으로 손턴 와일더의 ‘우리 읍내(Our Town)’를 올리기로 하고 동아리 리더였던 문호근(문익환 목사의 큰아들. 배우 문성근의 형. 예술의전당 예술감독을 하다가 일찍 죽는다)과 그의 짝패 이건용(한예종 총장이 됨. 지휘자 금난새도 동급생이었다)이 연세대 재학 중이던 오태석을 연극 코치로 초빙해왔다.

오태석은 조연출로 같은 연대생 정하연(후에 유명 TV 드라마 작가로 성공)과 꼭 삼국지의 장비처럼 생긴 홍익미대생 이두식(홍익 미대학장이 됨. 몇 년 전 갑자기 죽었다)을 무대장치 겸 진행요원으로 끌고 왔다.

문호근·이건용과 대학 동아리서 연극도

오태석의 진가는 연극보다도 그가 쓴 글에 더 잘 나타났다. 그 점 백남준과 흡사했다. 두 사람 다 달변 근처에도 못 가는데 그네들의 글은 진짜였다. 내가 젊은 날 글쟁이 베스트로 두 사람을 꼽는데 한 사람은 홍익미대 출신의 이제하 시인(내가 부르는 ‘모란동백’의 작사 작곡가)과 다음으론 오태석이다. 두 사람의 글에서는 늘 가락과 흥이 넘실댔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때 연극(윌리엄 인지(William Inge)의 ‘버스 정류장’,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도 했다)이나 하고 쎄시봉에 나가 띵까띵까만 해댈 입장이 아니었다. 한양대 때는 전액 장학생이라 크게 쪼들리진 않았지만 서울대는 많이 달랐다. 교회에서 성가대 솔로이스트라는 명목으로 주는 푼돈도 없어지고, 동신교회 김세진 목사님이 이따금씩 남몰래 쥐여주던 용돈도 받아 챙기곤 했는데 교회를 끊고 쎄시봉 같은 델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앞이 캄캄해졌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때부터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하염없이 누워만 계시고.

그리하여 내 생애 최초의 알바가 막 시작된다. 첫 번 알바는 당시 유행했던 이동훈 선생이 지휘하는 필그림합창단에 입단하는 것이었다. 이동훈 선생은 내가 다니던 동대문 근처 동신교회 성가대의 지휘자셨기 때문에 쉽게 들어갔다. 필그림합창단엔 무엇보다 급료가 좋았다. 이유가 따로 있었다. 매주 용산에 있는 미군부대 내에 있던 미군 교회에서 하청 성가대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트윈폴리오·조영남·펄시스터즈 노래가 함께 수록된 1970년 지구레코드에서 나온 앨범 재킷. [사진 성승모, 중앙포토]

트윈폴리오·조영남·펄시스터즈 노래가 함께 수록된 1970년 지구레코드에서 나온 앨범 재킷. [사진 성승모, 중앙포토]

일요일 이른 새벽이면 미군 대형버스가 후암동 종점까지 와 나를 태우고 빙빙 돌아 곳곳에 있는 성가대원들을 태우고 용산 미8군 부대로 들어간다. 버스에서 내리면 미국 목사님실(군목)로 우르르 들어간다. 거기엔 먹음직스러운 도넛(그때는 처음 보는 구멍 뚫린 빵이었다) 수십 개가 비스듬히 누워들 있다. 우리 단원들은 한두 개씩 집어 들고 바로 옆에 그냥 쓱 누르면 자동으로 나오는 커피를 들고 맛있게 먹는다. 물론 나도 따라 했다. 그런데 정작 성가를 불러야 할 시간에 나의 아랫배가 싸하고 아파 오는 거다. 급설사가 난 거다. 예배시간에 슬금슬금 빠져나와 화장실로 가는 건 정말 치욕적이었다. 그 다음주에도 이번에는 괜찮겠지 하며 또 먹었는데 역시 설사. 나는 세 번째까지 트라이를 해봤지만 허사였다. 생태적으로 우유를 못 마시는 저급 체질이라 나는 지금까지도 도넛과 커피를 같이 먹어본 적이 없다.

두 번째 알바는 음대 학생으로선 매우 특이했다. 한양대 때 이병훈과 똥건호와 함께 심심풀이 땅콩으로 익혀뒀던 팝송 몇 곡을 명동 ‘오비스 캐빈’이라는 음악 카페에서 주말마다 부르는 것이었다. 경희대 노래 패거리 중에 친하게 지내던 테너 엄정행과 베이스 이종범(일찍 죽었다)이 있었는데 종범이 아버지가 그 건물의 주인이셨다. 종범이는 나를 아버지 앞에 끌고 가 “얘는 클래식도 잘 부르고 팝송도 잘 부르는데 한 번 써보시죠!” 해서 취직이 된 거다. 위층에선 ‘히식스(He6)’라는 그룹이 시끌벅적 연주를 했고, 나는 아래층 분위기 있는 카페의 연주자였다.

그땐 무대 같은 곳도 없었다. 내가 노래를 부르는 곳은 그리스 신화의 영웅 헤라클레스가 나체로 양다리를 쩍 벌리고 활을 쏘는 조각상 바로 아래에 마이크 하나를 놓고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어쩌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헤라 선생의 남성 상징이 내 얼굴과 20㎝도 안 되게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민망했다.

그곳엔 매주 싱그러운 여대생 꼭 다섯 명이 토요일 저녁마다 나타나곤 했는데 얼마 후 알고 보니 그녀들은 이화여고 졸업반 학생들이었다. 화장을 짙게 하고 여대생으로 위장해 왔던 거다. 나는 그들과 급격히 친해졌다. 그중의 하나가 오태석 형의 평생 반려자가 됐고 나머지는 내 측근의 부인이나 연인으로 내 곁을 떠났다. 나만 닭 쫓던 개꼴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나는 남한테 궁한 내색을 잘 안 하는 편인데 학비조달이 정말 급했던 모양이다. 오비스 캐빈의 월급은 늘 내 개인 접대비로 다 나가곤 했다. 친구들이 오면 호기 있게 한턱 내기도 했다. 내 속사정을 잘 아는 똘강 이백천 선생이 나를 미8군 부대의 ‘A Train(에이 트레인)’이라는 악단의 강철구(색소폰 연주자) 단장에게 데려갔다. 무슨 노랠 불렀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나는 즉시 오디션 후보군으로 발탁된다. 후보라는 뜻은 매 철마다(쿼터제) 치르는 오디션에 응할 수 있다는 예선 통과 같은 의미였다. 바로 그날 화양쇼단(화양 회사 안에는 수십 개의 작은 쇼단들이 속해 있었다) 전무님이 나한테 LP판 한장을 골라주며 이 곡을 연습해서 오디션을 받아보라는 것이었다.

오디션 보는 날은 살벌했다. 죽느냐 사느냐의 전쟁터였다. 심사위원들은 전부 미군 장교들이었다. 요즘 우리가 미국 사람을 보는 느낌과 그때 우리가 느꼈던 미국 사람에 대한 느낌은 많이 다르다. 특히 장교복을 입은 미국 사람은 무시무시했다. 나중에 들었다. 그때 내가 불렀던 노래는 유명한 뮤지컬 ‘쇼 보트(Show Boat)’의 주제곡 ‘노인의 강(Old Man River)’으로 웅장하고 매우 드라마틱한 곡이었는데 내가 그 노래를 부르자 미국 심사위원들이 울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미국은 자국 군인들을 외국에 파견하면서 처음엔 위문단을 자체로 소화했다. 메릴린 먼로(노래도 잘 불렀다), ‘모나리자’를 부른 냇 킹 콜, 트럼펫 주자 루이 암스트롱 등이 나섰지만 파견 숫자가 많아지면서 유명인들은 몸값이 너무 세서 현지 위문단을 조직하게 된 거다. 우리 한국의 경우 소위 미8군 쇼단이 그것이다. 40여 개 쇼단이 있었다니 이 연재를 쓰면서 체험하게 된 건데 미8군 쇼단의 활약은 이 나라 역사 이래 최초의 서양문명의 물꼬를 직접 튼 거의 혁명에 버금가는 사건이었다. 미8군 쇼단 출신의 가수들이 김시스터즈, 최희준, 현미, 패티 김…, 이들이 한국 가요계에 끼친 영향만 봐도 얼추 짐작이 가리라 믿는다. 흠! 내가 역사적 순간에 존재했던 거다.

화양 쇼단 연습실에 가면 각 악단의 연주자 및 남녀 가수, 무용단원들이 득실득실했다. 나는 운 좋게 ‘에이 트레인’이라는 전통적인 쇼단의 최희준, 왕손(王孫) 가수 이석(‘비둘기집’으로 유명)의 배턴을 잇는 가수로 등용된 건데 나의 여성 파트너가 양양이 누나였다. 양양이 누나의 남편은 다른 쇼단의 피아니스트 박선길(‘오늘 같은 밤이면’을 부른 박정운의 아버지) 단장이었다. 박 단장님이 어느 날 장충동 녹음실엘 가자고 해서 구경 삼아 따라갔는데 거기서 나는 꿈에 그리던 대형 가수들, 최희준, 유주용, 위키 리, 박형준 등을 만나게 된다. 그때는 미국 팝송을 우리말로 번안해서 부르는 게 유행이었는데 주로 영어를 구사하는 실력자들이 주도해 나갔다. 박선길 단장은 편곡자였다. 으리으리한 장충 녹음실에서 녹음을 하다가 번역된 한국말의 아퀴가 잘 안 맞아 옥신각신할 때에 내가 어깨너머로 이렇게 이렇게 고쳐 부르면 되지 않느냐고 해서, 그날부터 나는 얼결에 유명 외국곡 번안가가 되어 버린다.

쇼단 첫 월급 거금 받고 서울음대 그만둬

펄시스터즈

펄시스터즈

예명도 얼른 지어냈다. 고철(高哲)이었다. 왜 고철이었는지 난 지금도 모른다. 어렸을 때 못 쓰는 고철 수집가들이 있었는데 쓸모없어진 철물들에 연민을 느꼈음일까. 나는 그때부터 고철로 이름을 바꾸지 않은 것을 가끔 후회도 해봤다. 나는 어림잡아 고철의 번안곡이 대여섯 곡쯤이나 될까 말까 싶었는데 나의 LP 컬렉터(고대 근처 정신과 성승모 원장)에 의하면 물경 30곡이 넘는다고 해서 기절할 뻔했다. 부수입이 짭짤했음은 물론이다.

그즈음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미8군 쇼 오디션 연습 중 다른 쇼단의 연습생인 나보다 어려 보이는 늘씬한 여성 자매를 알게 된다. 우리는 금방 친해져서 우리끼리 따로 트리오를 결성해서 일반 무대에 진출하자는 야멸찬 계획으로 맹연습에 돌입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똘강 이백천 PD가 잘됐다면서 한번 동양방송 10층으로 오라고 했다. 지금의 서소문 중앙SUNDAY 건물에 TBC 방송국이 있었다. 우리 셋은 설레는 가슴으로 기타를 하나씩 들고 약속장소 10층을 찾아갔다. PD들 휴게소 같은 곳이었다. 똘강 선생이 한번 불러 보라고 해서 우리는 준비해온 컨트리 포크송 ‘Before This Day Ends’를 열심히 불렀다. 내가 가운데 서고 양쪽에 자매가 하나씩 붙었다. 정작 노래를 시켜 놓고 똘강 선생을 비롯 아무도 우리한테 눈길을 주지 않고 “됐어! 집에 가 있어”라는 소리만 들었다. 우리는 그 후로 가타부타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 그게 이 세상에서 가장 불운했던 ‘조영남과 펄시스터즈’ 트리오의 전말이었다.

그 후로 내가 연락받은 건 나와 우리 악단이 A급 쇼단으로 합격했다는 것이었다. 한 달 후에 나온 월급봉투를 열어보고 나는 거의 실신한다. 거금 6만여 원이 들어 있었다. 그때 음대 한 학기 등록금이 6만5000원인가 그랬다. 나는 그 길로 교회에 이어 학교마저 미련 없이 때려치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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