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홍미옥의 모바일 그림 세상(71)
이러다 내 이름 석 자 쓰는 것도 잊어버릴 날이 올지도 몰라! 가끔 우스개로 하는 말이다. 언제부턴가 아니 꽤 오래전부터 글씨 쓸 일이 거의 없다. 겨우 그림 하단에 서명이랍시고 몇 자 휘갈기는 거 빼고는. 컴퓨터나 휴대폰으로 모든 걸 처리하고 계획하는 일상이 되다 보니 생긴 일이다.
소싯적엔 글씨를 잘 쓴다는 말도 가끔은 들었던가? 지금 난 어쩌다 몇 자라도 적을라치면 영 말이 아니다. 괜히 손이 떨리는가 하면 마음이 먼저 앞서가 글씨는 엉망이 되기 일쑤다. 맞춤법은 진즉부터 헷갈리게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집중력마저 흐릿해지니 글씨는커녕 책 한장 읽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게 되었다. 사실 구차한 변명이다.
손끝이 기억하는 나와 당신의 인생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코로나 시대의 친구가 된 지 오래다. 지루하고도 답답한 현실에 재미나게 놀아주는 친구이니 한편 고맙기는 하다. 온갖 흥미와 교양 루머 환상을 들려주고 보여주는 다양한 콘텐츠와 편리함이 강점이다. 하지만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아날로그 콘텐츠가 잔잔한 바람을 몰고 있다.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맛보는 필사가 그것이다.
종이 위에 또박또박 눌러 쓰는 글씨의 맛, 내 손이 기억하는 문장의 추억이 주는 즐거움은 상당하다. 나의 손끝으로부터 다시 살아난 시간을 마주하는 것이다. 한때 일기나 편지로 글쓰기를 했지만, 언제부턴가 모든 게 컴퓨터나 휴대전화기로 대체되었다. 그런 세대에게 다시금 ‘필사’의 바람이 불어오는 건 왜일까?
필사는 책을 되새김질하는 과정
작가 조정래는 ‘필사란 책을 되새김질하는 과정이다’라고 했다. 인생을, 시간을 되새김질한다면 많은 후회와 결심이 오고 갈 것이다. 여간 힘든 일이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필사에 빠져드는 이유도 이런 건 아닐까!
몇 년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흥미로운 작업이 진행되었다. 작가 안규철의 ‘1000명의 책’이다. 1000명의 관객이 전시 기간 연이어서 국내외 문학작품을 필사하는 필경 프로젝트였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순서대로 한 시간 동안 문학작품을 필사하는 작업이었다.
나도 ‘필경사의 방’이라고 이름 지어진 작은 공간에서 한 시간의 필사를 경험했다. 그때 써 내려 간 『무진기행』의 몇장은 두고두고 기억됨은 물론이다.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또박또박 글씨를 쓰는 경험은 참으로 새로웠다. 그 작업은 일체의 교정 없이 책으로 만들어져 참가자에게 보내졌다. 손으로 글 쓰는 일이 점점 사라지는 시대에 울리는 일종의 경종이었던 셈이다.
언제부턴가 책이 팔리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기사가 해마다 빠짐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전국의 작은 책방, 개인 SNS를 기반으로 들불처럼 번지는 독서 모임과 필사 모임은 그 말을 무색게 하고 있다.
골목 책방서 부는 필사의 바람
여기는 전주의 작은 책방, 골목 어귀에 자리한 책방 테이블에 서너 명이 뭔가를 쓰고 있다. 필사 모임이다. 이제는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걱정하지만 한편에서는 책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작은 책방이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독서 모임은 물론이고 이젠 대세로 자리 잡은 필사 모임은 작은 책방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책을 읽고 쓰면서 저마다의 감상과 새롭게 알게 된 생각을 메모하기도 한다. 시 한 구절, 소설 한 페이지, 혹은 몽땅 한 권 아니 대하소설 전권을 써 내려 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 단순한 글쓰기 연습이 아닌 손끝이 기억하는 책과 나의 시간을 꾹꾹 눌러 되새김한다. ‘빨리빨리’를 강요하는 시대에 느림의 필사가 주는 매력은 경험해 본 이들은 알고 있다.
봄꽃이 활짝 피었다. 마음을 단단하게 만드는 필사! 이미 도전하고 계시는가요?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