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내 손끝의 시간을 불러낸다, 유튜브는 모를 '필사'의 노력

중앙일보

입력 2021.04.02 15:00

업데이트 2021.04.02 15:16

[더,오래] 홍미옥의 모바일 그림 세상(71)

이러다 내 이름 석 자 쓰는 것도 잊어버릴 날이 올지도 몰라! 가끔 우스개로 하는 말이다. 언제부턴가 아니 꽤 오래전부터 글씨 쓸 일이 거의 없다. 겨우 그림 하단에 서명이랍시고 몇 자 휘갈기는 거 빼고는. 컴퓨터나 휴대폰으로 모든 걸 처리하고 계획하는 일상이 되다 보니 생긴 일이다.

소싯적엔 글씨를 잘 쓴다는 말도 가끔은 들었던가? 지금 난 어쩌다 몇 자라도 적을라치면 영 말이 아니다. 괜히 손이 떨리는가 하면 마음이 먼저 앞서가 글씨는 엉망이 되기 일쑤다. 맞춤법은 진즉부터 헷갈리게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집중력마저 흐릿해지니 글씨는커녕 책 한장 읽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게 되었다. 사실 구차한 변명이다.

느림의 미학, 필사가 주는 즐거움. 아이패드7 프로크리에이트. [그림 홍미옥]

느림의 미학, 필사가 주는 즐거움. 아이패드7 프로크리에이트. [그림 홍미옥]

손끝이 기억하는 나와 당신의 인생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코로나 시대의 친구가 된 지 오래다. 지루하고도 답답한 현실에 재미나게 놀아주는 친구이니 한편 고맙기는 하다. 온갖 흥미와 교양 루머 환상을 들려주고 보여주는 다양한 콘텐츠와 편리함이 강점이다. 하지만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아날로그 콘텐츠가 잔잔한 바람을 몰고 있다.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맛보는 필사가 그것이다.

종이 위에 또박또박 눌러 쓰는 글씨의 맛, 내 손이 기억하는 문장의 추억이 주는 즐거움은 상당하다. 나의 손끝으로부터 다시 살아난 시간을 마주하는 것이다. 한때 일기나 편지로 글쓰기를 했지만, 언제부턴가 모든 게 컴퓨터나 휴대전화기로 대체되었다. 그런 세대에게 다시금 ‘필사’의 바람이 불어오는 건 왜일까?

필사는 책을 되새김질하는 과정

작가 조정래는 ‘필사란 책을 되새김질하는 과정이다’라고 했다. 인생을, 시간을 되새김질한다면 많은 후회와 결심이 오고 갈 것이다. 여간 힘든 일이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필사에 빠져드는 이유도 이런 건 아닐까!

몇 년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흥미로운 작업이 진행되었다. 작가 안규철의 ‘1000명의 책’이다. 1000명의 관객이 전시 기간 연이어서 국내외 문학작품을 필사하는 필경 프로젝트였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순서대로 한 시간 동안 문학작품을 필사하는 작업이었다.

나도 ‘필경사의 방’이라고 이름 지어진 작은 공간에서 한 시간의 필사를 경험했다. 그때 써 내려 간 『무진기행』의 몇장은 두고두고 기억됨은 물론이다.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또박또박 글씨를 쓰는 경험은 참으로 새로웠다. 그 작업은 일체의 교정 없이 책으로 만들어져 참가자에게 보내졌다. 손으로 글 쓰는 일이 점점 사라지는 시대에 울리는 일종의 경종이었던 셈이다.

언제부턴가 책이 팔리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기사가 해마다 빠짐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전국의 작은 책방, 개인 SNS를 기반으로 들불처럼 번지는 독서 모임과 필사 모임은 그 말을 무색게 하고 있다.

골목 책방서 부는 필사의 바람

최근 동네책방을 중심으로 시간을 정해 함께 모여 필사를 하는 모임이 늘어나고 있다. 전주책방 소소당. [사진 김정숙]

최근 동네책방을 중심으로 시간을 정해 함께 모여 필사를 하는 모임이 늘어나고 있다. 전주책방 소소당. [사진 김정숙]

여기는 전주의 작은 책방, 골목 어귀에 자리한 책방 테이블에 서너 명이 뭔가를 쓰고 있다. 필사 모임이다. 이제는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걱정하지만 한편에서는 책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작은 책방이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독서 모임은 물론이고 이젠 대세로 자리 잡은 필사 모임은 작은 책방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책을 읽고 쓰면서 저마다의 감상과 새롭게 알게 된 생각을 메모하기도 한다. 시 한 구절, 소설 한 페이지, 혹은 몽땅 한 권 아니 대하소설 전권을 써 내려 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 단순한 글쓰기 연습이 아닌 손끝이 기억하는 책과 나의 시간을 꾹꾹 눌러 되새김한다. ‘빨리빨리’를 강요하는 시대에 느림의 필사가 주는 매력은 경험해 본 이들은 알고 있다.

봄꽃이 활짝 피었다. 마음을 단단하게 만드는 필사! 이미 도전하고 계시는가요?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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