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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금융위의 ‘신용 없는 신용카드’

중앙일보

입력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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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 없는 신용카드가 나왔다. ‘햇살론 카드’ 얘기다. 금융위원회는 그동안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없었던 저신용자에게도 카드 발급을 해주겠다고 지난달 30일 발표했다. 신용 평점 하위 10% 이하 중 소득 증빙이 가능하거나 국민연금 납부액 등 인정 소득이 있는 이들이 그 대상이다. 업계에서는 7~8등급 고객이 주요 수혜자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7~8등급의 저신용자는 카드 대금을 연체할 가능성이 커 카드사에선 외상을 내주기 꺼린다. 그래서 정부가 들고나온 것이 ‘신용 보강’이다. 신용 보강이란 낮은 신용도로 인해 금융 상품을 이용하는 데 불편함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정부가 연대보증을 서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저신용자가 햇살론 카드를 사용한 뒤 카드 대금을 갚지 못하면 서민금융진흥원이 대신 갚아주겠다는 거다.

당장 궁금해진다. 무슨 돈으로 갚아준다는 건가. 혹시 세금으로 메워준다는 것은 아닐까. 답은 ‘카드사 돈으로’다.

서금원이 대신 내주겠다는 돈은 실은 카드사 주머니에서 나왔다. 서민금융법 개정안이 통과되며 금융사들은 연간 일정 금액을 출자해 서민금융상품을 만들기로 했다. 은행은 1050억원, 농수산림조합은 358억원, 카드사를 비롯한 여신금융전문회사는 189억원을 낸다. 이 돈이 신용 보강 재원이 된다. 결국 저신용자가 카드 대금을 갚지 못하면 카드사가 낸 돈으로 돌려막겠다는 소리다.

금융 약자를 위한 정책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사기업이 낸 돈으로 정책을 펼치며 정부가 생색을 낸다는 게 문제다. 금융위는 “고객 수를 늘려 수수료를 더 벌면 카드사도 이득”이라고 설명한다.

저신용자 고객을 흡수해 가맹점 수수료를 조금이라도 더 받는 게 이득이라면 카드사는 진작 그렇게 했을 것이다. 지금껏 신용도가 낮은 이들에게 신용카드를 발급해주지 않은 것은 저신용자의 카드 이용으로 생기는 수수료 이득보다 연체 위험이 더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돈이 되고 안 되는지는 기업이 가장 잘 안다.

신용카드는 사용자의 ‘신용’에 기반해 발급되는 상품이다. 하지만 금융당국의 살뜰함 덕에 ‘신용 없는 신용카드’란 형용모순 상품까지 등장하게 됐다. 저신용자의 금융 복지를 위해 카드 발급이 필요하다면 제로페이 같은 지자체 결제 서비스나 특정 업종에서 이용 가능한 선불카드로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재정으로 해결해야 할 서민금융 정책을 민간에 떠넘기는 듯한 모양새도 좋지 않다. 세금 낭비라는 비판이 두려워 그랬다면 적어도 햇살론 카드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라는 식의 설명은 접어두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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