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중앙시평

우리는 바닥의 하류인생인가

중앙일보

입력 2021.04.02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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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위와 바닥, 그 표현이 불편하다. “위에는 맑아지기 시작했는데 바닥에 가면 잘못된 관행이 많이 남아있다”는 발언이 그렇다.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친여 매체에 한 말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 투기 사태를 염두에 뒀다지만 그의 잠재인식이 보인다. 자신을 포함한 위의 상류인생들은 깨끗한데, 바닥의 하류인생들은 혼탁하다는 의미로 들린다. 그는 “그런 것까지 고치려면 재집권해야 한다”고 했다. 아랫것을 훈육하겠다는 운동권 출신 정치인의 도덕적 우월주의가 풍긴다.

맑은 윗물-혼탁한 아랫물 이분법
독립투사 반열 오르려는 선민의식
민주화 성취를 독점한 운동권 신화
오만 방치하면 ‘바닥’ 소리 듣는다

민주화 기여와 미흡한 예우, 그 선민의식은 오만하다.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73명이 민주유공자예우법을 발의했다가 4·7 보궐선거를 의식했는지 잠시 후퇴했다. 유신 반대 운동과 6월 항쟁에 참여했던 운동권 인사들을 유공자로 지정하고 자녀들까지 교육·취업 등을 지원하는 법이다. “민주화에 공헌한 사람에게 합당한 예우를 한다”는 게 명분이다. 운동권이 법을 만들고 셀프로 유공자가 되고, 그 특혜를 자식에게도 대물림하는 그림이다. ‘공헌 없는 대중’과 자신들을 차별화하고, 토착 왜구와 싸운 독립투사 반열로 승화시키겠다는 자아도취가 느껴진다.

운동권 신화가 우리 사회를 지배한다. 이 나라의 민주화가 오로지 운동권의 투쟁과 희생 덕에 성취된 것이라는 영웅 신화가 배회한다. 신화는 무오류의 아우라를 구축한다. 정의의 사도가 엔지니어링 되고 대중은 받듦의 추종자로 전락한다. 그런 환상의 세계에서 위와 바닥은 청정과 오염으로 나눠지는 다른 계급이고, 특권과 반칙은 예우로 둔갑한다.

운동권이 대거 포진한 청와대의 풍경이 그렇다. 대통령은 경남 양산에 영농 경력 ‘11년’으로 적고 형질을 대지로 바꿔 저택을 지으면서 농지투기 단속을 남 일처럼 말한다. 청와대 2인자였던 임종석 전 비서실장은 “박원순 그렇게 나쁜가”라며 끊임없이 2차 가해를 가한다. 김상조 전 정책실장은 자기 집 전셋값을 왕창 올려놓고 세입자 보호를 태연하게 외친다. 재개발 투기 탓에 물러났던 김의겸 전 대변인은 보란 듯이 국회의원으로 영전했다. ‘맑은 윗물’과는 거리가 멀지만 문제의식이 없다.

이해찬은 세종시에서 농지 일부를 대지로 바꿔 땅값이 4배 올랐다고 한다. 이 땅 근처에 ‘우연히도’ 고속도로 나들목이 생긴다. 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박주민 의원은 법안 통과 한 달 전 자신의 서울 아파트 임대료를 크게 올렸다. 구정물이 집권당을 흐른다.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은 김해 신공항 추진을 폐기하고 가덕도 신공항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못사는 사람들이 밥을 미쳤다고 사 먹냐”던 그가 28조원이 쏟아질 테니 ‘밥 사 먹을 노다지’를 잡으라고 투기를 부추기는 셈이다. 예비 타당성 조사를 면제한 97조원의 토건사업은 큰 투기판이 섰다는 신호다. 고위공직자 절반이 땅을 보유 중이다. 그래 놓고 투기와의 전쟁을 얘기한다. LH 직원들의 일탈은 배우고 따라 한 모방범죄일 수 있다. 공공기관에 셀 수 없는 낙하산을 투하하면서 일자리에 신음하는 청년들을 걱정하는 척한다. 이게 당·정·청 윗물의 추한 자화상이다.

이 정권의 주류인 86운동권은 5060세대에 속한다. 그들이 대학에 다닐 때 운동을 통해 정치적 사회변혁을 꿈꾸던 친구들과, 기업에 뛰어들어 부유한 서구의 민주사회를 따라잡으려던 친구들이 섞여 있었다. 자란 환경, 어울리던 선후배에 따라 운명이 갈렸다. 엘리트 운동권은 민주화 세력이란 훈장을 달고 정치인이 됐다.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세일즈맨은 세계를 뛰어다녀 3만 달러의 선진국으로 끌어올렸건만 박정희 시대의 유물인 양 산업화 세력으로 깎아내렸다.

넓은 세상을 경험한 산업화 세력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보수도 진보도 아니다. 이념편향성이 옅은 실용적 합리주의자들이 많다. 엄혹한 시절 운동권 친구들이 겪은 고초를 알기에 부채의식을 느끼는 염치가 있다. 과대포장된 운동권 자본을 앞세워 국회와 청와대와 정부의 요직을 독차지해도 운동의 순수성을 믿고 밀어줬다. 그 보답으로 돌아온 게 위선과 내로남불로 뒤범벅된 참담한 현실이다. 미 국무부 인권보고서가 조국·박원순·오거돈·김홍걸·윤미향의 성추행과 부패를 흉봐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무감각한 권력이다.

왜곡된 신화를 깰 때가 됐다. 1987년 6월 항쟁만 해도 운동권이라 다 한 것처럼 윤색됐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밝힌 용감한 기자들, 이한열 열사의 죽음, 넥타이부대 등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다. 이병철·정주영이 노동자의 피와 땀 없이 혼자 이 나라 경제를 일으켜 세우지 않은 것처럼. 2016년 겨울의 ‘촛불’도 성난 시민의 열망이 피워냈건만 열매는 운동권이 독점했다.

‘샤이 진보’ ‘샤이 보수’는 없다. 퇴보와 꼰대를 거부하는 합리주의자가 지지를 거두는 현상일 뿐이다. 민주화 완장에 주눅이 들고 ‘선출된 권력’의 폭력에 무기력하니 업신여긴다. 조지 오웰이 말했다. “거짓이 판치는 시대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곧 혁명이다.” ‘우리는 바닥의 하류인생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게 그 첫걸음이다.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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