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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재준의 의학노트

왓슨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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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임재준 서울대 의대교수 의학교육실장

임재준 서울대 의대교수 의학교육실장

두툼한 몇 년치 진료기록을 가지고 오는 환자를 처음 진찰하는 것은 늘 부담스럽다. 심각하고 복잡한 병을 가진 환자라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어진 단 몇 분의 진료시간 동안 정확한 진단과 처방은커녕 환자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는 것도 어렵기 때문이다.

의료 접근성 세계 최고라지만 #진료 시간은 형편 없이 부족 #의사 본연의 모습을 찾는 일 #의료 인공지능들이 도움줄 것

코로나19 대처에서 괜찮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우리 의료시스템의 단점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사소한 증상에도 병원을 찾는 문화와 작동하지 않는 의료전달체계 때문에 우리나라 의사들은 평균 4분에 한 명씩 환자들을 진료해야 한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환자의 병력을 자세히 묻고, 복잡한 검사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염두에 두고 있는 병이 어떤 것들인지에 대해 환자에게 알리는 것은 난망하다. 상황이 이러니 의사들이 환자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환자들은 늘 서두르며 모니터만 쳐다보는 의사들을 신뢰하고 따르기 어렵게 된다.

감기로도 대학병원을 쉽게 찾을 수 있을 만큼 ‘접근성’은 세계 최고지만, 그 대가로 우리 의료는 속전속결과 박리다매로 점철되어있다. 서로를 신뢰할 수 없게 만드는 이런 시스템에서 의사와 환자 모두 과도한 검사에 의존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필요한 검사를 고르고 결과를 확인하느라 의사와 환자가 신뢰를 쌓아갈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서로의 관계는 서먹해지게 된다. 왜곡된 시스템 때문에 비틀어져 버린 우리 의사-환자 관계가 나아질 희망은 영 없는 걸까?

구원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부터 오고 있다. 바로 인공지능이다. 1997년 IBM에서 만든 슈퍼컴퓨터 ‘딥 블루’가 체스 세계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를 이겼고, 2011년에는 같은 회사의 ‘왓슨’이 미국의 인기 퀴즈 프로그램 ‘제퍼디’에 출연하여 2명의 챔피언을 꺾었다. 2016년에는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가 한때 세계 바둑 최강자였던 이세돌 9단을 이겨버렸다. 이제 어떤 이들은 판사나 기자는 물론 의사의 역할도 곧 인공지능이 대신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의사 대신 인공지능이 진단하고, 처방하고, 수술은 로봇이 맡는 새로운 시대가 열려 대부분의 의사들은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의학노트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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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IBM의 의료용 인공지능 왓슨이 환자 진료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여러 해 전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의사를 대체할 것이라는 호사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왓슨은 의사를 돕는 역할을 한다. 왓슨의 주 임무는 환자의 정보와 검사 결과를 종합한 후 이와 관련된 의학 지식과 그간의 연구 결과를 분석하여 적절한 치료방법 몇 가지를 의사에게 추천하는 것이다. 최근 개발되고 있는 인공지능들도 수없이 반복되는 단순한 영상검사나 병리검사, 안저검사 판독을 대신해주거나, 대장내시경에서 의사들이 놓치기 쉬운 작은 용종들을 찾아주는 역할을 목표로 한다. 한편으로는 패혈증 발생이나 사망의 위험을 예측하거나, 치매나 자살의 위험성을 제시하는 인공지능들도 개발되고 있다. 즉, 인공지능의 역할은 의사가 더 정확히 진단하고, 더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IBM이 의료 인공지능을 왓슨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그 회사의 첫 번째 CEO였던 ‘토마스 왓슨’의 이름을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왓슨’이라는 이름은 우리들에게 셜록 홈즈의 친구이자 조력자로 훨씬 더 익숙하다. 왓슨이 친구 홈즈에게 그랬던 것처럼, 인공지능들은 의사들이 환자의 병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최선의 치료법을 찾을 때 도움을 주는 동료가 될 것이다. 이에 더하여 엉뚱한 약물이 처방되거나 과량이 투여되는 것 같은 실수까지 막아주는 고마운 친구 말이다.

충직한 동료인 인공지능 덕에 지루하고 단순한 판독이나 부주의한 실수로부터 자유로워진 의사들은 원래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으리라. 질병의 원인을 연구하고 더 정확한 진단법을 고안하고 더 나은 치료 방법을 개발하는데 전력을 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검사 결과를 일일이 확인하고 적절한 치료법을 검색하는 단순 작업은 인공지능에게 맡기고, 환자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꼼꼼하게 진찰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공지능 따위는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의사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 환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위로하며 그들의 고투를 격려하는 진짜 의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의사들을 자유케 하리라.

임재준 서울대 의대 교수 의학교육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