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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 뒤흔든 아케고스 파문…'패밀리 오피스' 10년만의 기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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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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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가문의 ‘재산 지킴이’ 회사가 금융 시장 혼란의 주범으로 몰렸다. 마진콜(추가 증거금 요구) 디폴트 사태로 최근 미국 월가를 뒤흔든 헤지펀드 아케고스 캐피털이 한국계 투자자 빌 황(57·황성국)이 운영하는 ‘패밀리 오피스(family office)’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100억 달러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던 아케고스가 총수익스와프(TRS) 방식으로 원금의 5배가량인 500억 달러 상당을 투자하다 보유 주식의 주가 하락에 따른 추가 증거금을 내지 못하며 문제가 생겼다. 아케고스가 마진콜에 응하지 못하면서 보유주식에 대한 반대매매가 이뤄져 시장에 엄청난 물량의 주식이 쏟아진 것이다. JP모건 등에 따르면 아케고스 사태로 인한 금융권 손실은 최대 100억 달러로 추산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아케고스 사태는 (시장의) 레이더를 벗어나 활동하던 패밀리 오피스의 영향력을 확인시켜줬다”며 “엄청난 자산을 굴리는 소수의 패밀리 오피스가 시장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게 증명되며 미국 규제 당국이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한국계 헤지펀드 투자자 빌 황(한국명 황성국)의 소식을 다룬 파이낸셜 타임스(FT). [FT 캡쳐]

한국계 헤지펀드 투자자 빌 황(한국명 황성국)의 소식을 다룬 파이낸셜 타임스(FT). [FT 캡쳐]

패밀리 오피스가 뭐길래

패밀리 오피스 역사. [중앙포토]

패밀리 오피스 역사. [중앙포토]

패밀리 오피스는 이른바 ‘부자는 삼대를 못 간다’는 통념을 깨려 만들어졌다. 막대한 부를 관리하고 지키기는 어려운 일이다. 후손이 재산을 날릴 위험도 높다. 그래서 자신과 가문의 자산을 전문가의 손에 안전하게 보호·관리받으려는 수요가 생긴 것이다. 패밀리 오피스의 기원을 유럽 왕실의 집사 사무실이나 부유한 상인 가문이 설립한 개인 은행 등으로 보는 이유다.

패밀리 오피스의 공식적 출현은 19세기다. 1838년 금융 재벌인 모건가가 ‘하우스 오브 모건’을 설립했다. 미국 석유왕 록펠러가 1882년 ‘록펠러 패밀리 오피스’를 만들면서 ‘패밀리 오피스’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20세기 들어 멜런가와 록펠러가 등 미국 부유 가문이 패밀리 오피스를 애용하며 유명해졌다.

자산 보전 아닌 편법 투자 수단?

'패밀리오피스'인 헤지펀드 아케고스 캐피털매니지먼트 사무소가 들어서 있는 것으로 알려진 미국 뉴욕 맨해튼 7번가 888번지 [로이터=연합뉴스]

'패밀리오피스'인 헤지펀드 아케고스 캐피털매니지먼트 사무소가 들어서 있는 것으로 알려진 미국 뉴욕 맨해튼 7번가 888번지 [로이터=연합뉴스]

부유한 가문의 자산을 관리하던 패밀리 오피스는 2000년대 들어 다른 이유로 인기를 끌게 됐다. 금융당국의 규제를 피할 수 있는 수단으로 떠오르면서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헤지펀드도 규제 당국의 손아귀를 피해갈 수 없었다. 2010년 도드-프랭크법이 통과되며 1억 달러가 넘는 자산을 관리하는 헤지펀드는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등록하게 됐다. 거래 기록도 제출해야 했다.

하지만 패밀리 오피스는 이런 의무에서 자유로웠다. 로이터 통신은 “지난 10년간 헤지펀드 업계의 스타들이 주로 패밀리 오피스로 전환을 꾀했다”고 전했다. 규제의 우회로가 된 셈이다.

헤지펀드의 전설인 조지 소로스가 2011년 자신이 운용하는 퀀텀펀드에 있던 외부 투자금을 돌려준 뒤 남은 자산을 패밀리 오피스로 전환했다. 존 폴슨과 존 아널드 등 유명 헤지펀드 투자자도 헤지펀드를 접고 패밀리 오피스를 차렸다. 아케고스 캐피털 역시 헤지펀드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빌 황 일가의 100억 달러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세웠다.

헤지펀드 업계 전설로 불리는 조지 소로스. 2011년 패밀리 오피스를 만들었다. [AP=연합뉴스]

헤지펀드 업계 전설로 불리는 조지 소로스. 2011년 패밀리 오피스를 만들었다. [AP=연합뉴스]

이런 배경 속에 패밀리 오피스의 성장세는 가팔랐다. 로이터통신이 영국 패밀리 오피스 분석업체인 캠든웰스 자료를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패밀리 오피스가 2년간 38% 늘었으며 총자산은 6조 달러로 추정했다. 컨설팅업체 언스트앤영(EY)은 올해 기준 “전 세계 패밀리 오피스 숫자는 1만개에 이른다”며 “사모펀드와 벤처캐피털을 합친 것보다 글로벌 패밀리 오피스의 자본이 더 많다”고 추정했다.

헤지펀드보다 더 공격적…“터질 게 터졌다”

[로이터=연합뉴스]

[로이터=연합뉴스]

문제는 패밀리 오피스가 공격적 투자를 남발한 데 있다. WSJ는 “더 많은 패밀리 오피스들이 위험에 무감각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헤지펀드 매니저나 설립자들이 패밀리 오피스를 세우고 운영하면서 헤지펀드의 공격적 투자 전략을 적용한 탓이 크다. 높은 수익을 내려 복잡한 파생상품 투자나 위험한 레버리지 베팅도 서슴지 않았다.

아케고스 캐피털도 마찬가지다. 빌 황은 최고 다섯 배의 레버리지(지렛대 효과)를 이용한 공격적 투자로 위험을 키웠다. 결국 투자 기업의 주가가 폭락하면서 손실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런 투자방식은 헤지펀드보다도 공격적이라는 게 업계의 이야기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헤지펀드는 금융당국 규제와 고객을 의식해 과거보다는 보수적인 투자성향을 보인다.

패밀리오피스 컨설팅업체인 서커스 그룹의 조셉 라일리 이사는 WSJ에 “패밀리 오피스를 통해 1980~90년대의 (공격적) 헤지펀드가 되살아난 것 같다”며 “(아케고스 사태 같은) 일이 이전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터질 것이 터졌을 뿐”이라고 말했다.

규제 벼르는 美 정치권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 앞에 세워진 '두려움없는 소녀상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 앞에 세워진 '두려움없는 소녀상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아케고스를 통해 터진 패밀리 오피스 사태는 미 정치권 내 월가 규제 강화론에 더욱 힘을 싣고 있다. ‘월가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워런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은 “아케고스 사태는 불투명한 파생상품 거래와 개인 간 암거래, 높은 레버리지 등 위험한 시장의 속성을 보여준다”며 “금융 당국이 은행 등에 더 많은 투명성을 요구하고 감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 금융당국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WSJ는 “미 SEC가 아케고스 캐피털 사태에 대한 예비 조사에 착수했다”고 전했다. 미 CNBC 방송은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이 지난달 31일(현지시간) 금융안정감독위원회(FSOC) 회의에서 헤지펀드 감독을 강화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옐런이 아케고스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일부 헤지펀드의 레버리지가 시장 불안정성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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