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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공간은 우리를 상상하게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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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공간의 정치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그래픽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그래픽

학생들이 학업 상담뿐 아니라 연애 상담을 하러 오기도 한다. 그 경우, 일단 나는 상담할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축하한다. 인생에서 뭔가 흥미로운 일이 발생하고 있군요, 그건 일단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매사 시들하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가슴 설레게 하는 일도 없다면, 인생 자체가 재미없을 수 있지요. 연애의 경우, 시작은 좋기 마련이나 끝이 좋기는 쉽지 않죠. 그 끝이 이별이든 결혼이든 간에, 연애는 언젠가 끝나게 되어 있어요. 마무리를 잘하는 게 중요합니다.

거리 곳곳에서 무덤과 마주친다면 #인간이 필멸자임을 상기하게 돼 #공간은 연애·공부·정치에도 영향 #‘공간의 정치’ 숙고하는 시장 나오길

이 정도 조언에 만족하지 않고, 구체적인 데이트 전략을 물어보는 학생도 있다. 그럴 때는 이렇게 대답하는 거다. 데이트 상대가 포유류라면 중간중간 디저트를 먹는 게 중요합니다. 포유류는 허기가 지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거나 여유를 잃는 경향이 있거든요. 데이트하는 동안 달달함을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디저트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공간이에요. 일단 좋은 산책 코스를 발굴하세요. 멋진 산책로를 걸으면서, 마치 항의하듯이 “대체 왜 나를 좋아하는 거죠”라는 대사를 읊어보는 거죠. 다가오는 서울시장 선거에서 누가 당선될지 모르지만, 곳곳에 좋은 산책 공간들이 생기도록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실내 공간도 중요해요. 무슨 기념일 식사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좀 비싼 식당을 찾아갈 가능성이 높죠. 자신의 소박함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시장에 가서 길거리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치인이 아니니까요. 대신, 상대의 예상보다 약간 더 좋은, 가볍게 놀랄 수 있는 정도의 식당에 가보는 겁니다. 아니,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살짝 들 정도로요.

그곳에 가서 양질의 음식을 먹는다고, 음식 자체에만 집착하면 안됩니다. 맛을 느끼는 일이 단지 혀의 미각돌기의 문제는 아닙니다. 맛은 상당 부분 상상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요리사들은 음식뿐 아니라 음식의 배치, 식탁, 식탁보, 식기, 인테리어에도 신경을 씁니다. 그림 감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림 자체뿐 아니라 어떤 액자에 넣어 어느 공간에 어떻게 걸어놓느냐가 감상을 크게 좌우합니다. 옷이 단지 추위를 막는 헝겊 이상의 것이듯이 음식은 허기를 달래는 단백질과 탄수화물 이상의 것입니다. 공간이 발휘하는 상상의 힘은 음식의 맛을 좌우합니다.

공간의 중요성은 단지 실내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목적지 식당에 이르기까지 동선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화장실 동선입니다. 연애 1주년 기념 식사를 하다가, 화장실이 외부에 있어서 추운 밖으로 나가야 한다면, 그것도 건물을 빙 돌아 철문을 열어야 나타나는 지저분한 화장실에 다녀와야 한다면, 분위기가 깨지고 말 겁니다.

이 정도 이야기하면 학생도 자못 수긍하는 눈치다. 모처럼 찾아온 학생을 연애 상담만 해서 보낼 수는 없다. 차제에 공부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게 어디 음식뿐일까요. 공부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인터넷 강의를 듣는 것과 다릅니다. 맛을 느끼는 일이 단지 혀의 미각돌기의 문제에 불과하지 않듯, 공부는 단지 콘텐트를 머리에 욱여넣는 문제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공부 역시 상당 부분 상상의 문제입니다.

그날의 취지에 맞는 식당을 공들여 찾아가야 하듯이, 자기 공부에 맞는 공간을 애써 찾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캠퍼스가 다른 장소와 구별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뭔가 공부에 적절한 공간이어야 하는 거죠. 그 적절하다는 말이 꼭 건물이 크냐, 빔프로젝터가 설치되어 있느냐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존재하느냐, 청소 담당자가 쉴 공간이 있느냐, 구성원들이 자연스레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있느냐도 공부의 상상력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겁니다.

실험실, 엘리베이터, 휴게실과 같은 것은 재원만 있다면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돈이 있다고 해서 금방 만들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역사가 오래된 건물 같은 것들이지요. 여러분이 다니는 이 캠퍼스의 건물들만 해도 몇십 년만 지나면 때려 부수고 새로 짓기 때문에 거의 다 새 건물들입니다. 새거라고 좋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제 연구실이 있는 이 건물을 예로 들어보죠. 터무니없이 크기만 해서 친해지기 어려운 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둡고 긴 복도는 사람을 초대하기보다는 밀어내는 느낌을 줍니다. 학생들이 선생을 만나러 오고 싶다가도 어쩐지 복도 앞에서 움츠러들 것 같습니다. 외벽의 타일 색깔은 또 어떻습니까. 많은 이들이 거대한 공중 목욕탕이라고 놀리지 않습니까. 건물 밑에 물이 흐르고 있다는 괴담은 과연 사실인지…. 이런 이유로 저도 이 건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캠퍼스 안에 1년이 멀다 하고 새 건물들이 속속 들어섬에 따라서, 이 건물이 압도적으로 낡아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그때부터 저는 이 건물에 어떤 폐허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폐허라…. 폐허만이 줄 수 있는 어떤 기묘한 아름다움과 깊이라는 게 있습니다. 영국에는 잔해만이 남은 다양한 폐허 유적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저는 폐허가 된 커크햄 수도원(Kirkham Priory)에 가 본 적이 있는데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특이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폐허가 된 파운틴스 수도원 유적(Ruins of Fountains Abbey)도 있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매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곳을 방문합니다. 잔존하는 건물이 단지 오래되어서가 아니라, 허물어지고 퇴락한 잔해가 주는 어떤 독특한 울림이 있기 때문이지요.

바로 그와 같은 독특한 울림을 바로 제가 있는 이 건물로부터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캠퍼스 내의 다른 건물들과 이 건물 간의 격차가 정도 이상으로 벌어져 버렸을 때, 그 폐허미의 느낌이 마침내 왔습니다. 그 느낌은 새 건물은 결코 줄 수 없는 것이라서, 주변에 새 건물들이 생기면 생길수록 이 낡은 건물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조금만 더 버티면, 한 시대의 열악했던 미감을 증거하는 유물로서 독보적인 가치를 지니게 될 것 같았습니다. 험난했던 역사를 가르치기에 최적인 건물이 되어가는구나! 그런데 이 건물도 보수 혹은 신축하기로 최근에 결정되었다는군요.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네요. 새로 태어나는 건물은 사라질 폐허미를 보상하고 남을 만큼 멋진 건물이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어디 학교 캠퍼스만의 문제일까요.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적용해 볼 수도 있습니다. 서울을 처음 방문한 외국인에게 도시의 인상을 물으면, 생긴 지 몇십 년밖에 안 된 신도시 같다고 대답하곤 합니다. 그만큼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역사의 깊이를 느끼기 쉽지 않은 공간이라는 말이겠지요. 역사의 깊이를 느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도시들도 있지요. 이탈리아의 피렌체나 일본의 교토나 한국의 경주 같은 도시들. 피렌체를 걷다 보면 도처에서 이런저런 성당을 마주치게 되고, 교토를 걷다 보면 크고 작은 절들을 마주치게 되고, 경주를 걷다 보면 여기저기서 무덤들을 마주치게 되고, 서울을 걷다 보면 도처에서 공인중개사 사무소(복덕방)를 마주치게 됩니다.

일상적으로 무엇을 마주하게 되느냐가 그 사람의 상상력에 영향을 미칠 겁니다. 예컨대, 도시 곳곳에 무덤이 있다면, 길을 걷다가 문득 인간이 필멸자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겠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공간의 구성은 현실 정치와도 직접적인 관련을 맺습니다. 어디에 어떤 규모의 광장이 있느냐가 집회의 규모와 성격에 영향을 미치겠지요. 주요 관공서가 모여 있느냐, 분산되어 있느냐가 점거의 규모와 동학에 영향을 미치겠지요. 다양한 사람들의 교류를 촉진해야 한다는 이른바 소셜 믹스(social mix) 역시 공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는 도심에서 퀴어 축제를 여는 데 반대한다며, 퀴어 특구라는 것을 제안한 정치인도 있었네요. 차별과 배제에 반대하는 정치적 구호와 퀴어 특구 제안 간에는 상당한 모순이 느껴집니다.

서울시장 선거가 불과 며칠 뒤로 다가왔습니다. 조속한 해결을 기다리는 여러 행정상의 난제뿐 아니라, 장기적인 공간의 정치에 대해 잘 숙고할 수 있는 이가 시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연애 상담을 하다가 이야기가 곁길로 빠졌네요. 또 면담을 원하면 언제든 연구실로 다시 오세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