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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한쪽만 선택하지 않으려면 정교한 외교 전략 짜야

중앙일보

입력 2021.04.01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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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성배 전 국가정보원 해외정보국장·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

김성배 전 국가정보원 해외정보국장·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

최근 중국은 서방 중심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내수 위주 성장으로 자생력을 키우고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에서 중국을 추종하는 국가들을 규합해 자국 주도 세계를 구축하려고 한다.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들고, 서방에 의존하지 않는 가치사슬 체계를 구축하며, 별도 기술 표준을 확립하고, 독자적 정보 네트워크와 위성항법시스템(GPS)을 작동하려 한다.

한국 국력은 어설픈 줄타기보다
미·중 모두 포용하는 전략 절실

수년 전만 해도 중국의 지배적 외교 담론은 신형 대국 관계였다. 기존 패권국과 신흥 도전국이 충돌하는 과거 패턴이 필연적으로 반복될 이유는 없다는 논리다. 중국이 최근 전면에 내세우는 운명공동체론은 하나의 통합된 세계를 지향한다. 그러나 패권주의와 일방주의를 반대하고 다자·공정·개방·포용을 강조하는 속내는 미국 주도 세계 질서에 대한 대안적 질서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최근 미·중 외교 고위급 회담에서 밀리지 않겠다며 대립각을 세운 게 대표적이다. 중국의 전략은 미국의 반중 공세를 이기고 미·중 관계의 안정적 관리보다 세계 질서 경쟁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미국도 중국을 거대한 도전이자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하며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의 미·중 전략 경쟁이 자국 우선주의에 기초한 강대국 게임 양상이었다면,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미국이 가치와 동맹을 내걸고 세계 질서 경쟁에 나섰다. 미국이 지난달 3일 발표한 ‘국가 안보 전략 지침’은 국제 규범·규칙은 중국이 아니라 미국이 정해야 한다며 세계 질서 수립에서 중국과 경쟁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미·중 전략 경쟁이 한쪽으로 결정적으로 기울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복수의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 사실 복수의 세계는 세계 외교사의 보편적 형태였다. 유럽의 근대 국제 체제가 확산돼 단일한 세계가 형성되기 전에는 문명권 별로 별개의 국제 질서가 존재했다. 중화 질서, 유럽 국제사회, 이슬람 세계가 다른 조직 원리로 작동했다.

문제는 우리가 동시에 여러 세계에 속하는 경우다. 한국은 한·미 동맹을 고리로 서방 세계에 속해 있다. G7 회의에 초청받을 정도로 서방 세계에서도 비중 있는 국가다. 동시에 중국과의 경제·문명적 연계도 무시할 수 없다. 아직은 중국과 서방 세계가 경제·기술적으로 연결돼 견딜 만하지만 분절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한·미 동맹 이탈은 선택지가 아니지만, 우리 대외 교역의 25%를 차지하는 중국과의 단절도 상상하기 어렵다. 한쪽의 선택을 요구당하는 딜레마에 처할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을 요구한다고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건 아니다. 복수의 세계에 이중 멤버십을 유지하는 게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원적 국제 질서를 경험했다. 19세기 말 서세동점(西勢東漸) 정세에서 한편으로는 전통적 중화 질서가 잔존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방 국가들과 수교하면서 주권 질서가 작동했다. 하나의 조직 원리가 다른 조직 원리에 간섭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유길준은 이를 양절체제(兩截體制)라 불렀다. 그러나 양절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중화 질서가 무너지며 우리는 근대 국제 질서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했다.

다행히 대한민국은 쇠락한 대한제국과 다르다. 세계 10위 경제력과 군사력, 날로 성장하는 소프트파워를 지닌 국가다. 약소국이라면 어설픈 줄타기 대신 어느 한 세계를 선택하는 게 현명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복수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려면 복수의 세계로 구성되는 메타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상상력과, 당당하게 이중 멤버십을 주장하는 정치적 의지, 이를 정책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정교한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

김성배 전 국가정보원 해외정보국장·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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