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궤짝에 고이 모셔둔 이야기는 보물 안된다

중앙일보

입력 2021.03.31 10:00

[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옛이야기(57)

“폭설이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어느 겨울, 가난한 소년은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썰매에 장작을 싣고 집에 오던 길에 소년은 너무 추워서 곧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잠시라도 몸을 녹여야겠다고 생각한 소년은 불 피울 자리를 만들려고 눈을 헤쳤다. 그런데 눈 속에서 작은 황금열쇠가 반짝였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여러분은 이 이야기의 다음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까 궁금해질 것이다. 나는 흔히 표창장과 함께 주는 부상을 떠올리며, 이 소년이 이제 부자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황금’에 눈이 멀어 열쇠라는 키워드를 놓쳤다. 소년은 열쇠에 집중했다.

“열쇠가 있다면, 어딘가 분명 자물쇠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소년은 눈 속을 좀 더 파헤쳐 봤다. 과연 철로 된 작은 궤짝 하나가 나타났고, 소년은 황금열쇠가 그 상자에 맞길 바라면서 열쇠 구멍을 찾았다. 한참을 이리저리 살핀 끝에야 겨우 아주 작은 구멍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소년은 열쇠를 구멍에 집어넣고 한 번 돌렸다.”

황금열쇠가 눈밭 속에서도 소년의 눈에 띄었던 것은 세상에 선을 보일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진 pixabay]

황금열쇠가 눈밭 속에서도 소년의 눈에 띄었던 것은 세상에 선을 보일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진 pixabay]

이제 드디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려는가? 이 상자는 마치 흥부의 박 속에 있던 상자처럼 돈과 쌀이 그득한 보물이었을까? 아니면 뜬금없이 지니 같은 요정이라도 나타나려나. 혹은 어여쁜 여인이 나타나 자신과 함께 살자고 하려나?

상상력을 마구 펼쳐보았으나 막상 이 이야기의 끝은 약간 허무하기까지 하다. 그림 형제의 민담집에서 가장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는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이제 우리는 그가 뚜껑을 열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상자에 어떤 놀라운 것이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상자 속 보물을 무엇으로 상상하든 그 이상이 될까? 마구 상상해 보았던 그 어느 구석에 이 이야기의 정답이 있기는 한 걸까? 왜 이런 결말이? 황망하던 중, 마치 연관검색어처럼 떠오르는 우리 민담이 있었다. 너무 결정적 키워드가 이 이야기 안에 담겨 있다.

옛날에 한 총각이 어디서 재미난 이야기를 듣고 와서는 이걸 적어서 궤 안에 넣어 놓았다. 어느 날 총각의 몸종이 쇠죽을 끓인다고 아궁이 앞에 앉아 있다가 어디선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서 귀 기울여 보니, 총각이 낼모레 결혼을 하는데, 그때 한 놈은 청실배가 되고 한 놈은 옹달샘의 파란 물이 되고 한 놈은 송곳이 되어 이 총각을 죽이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몸종은 총각이 결혼식을 하려고 처가에 가는 길에 배를 따 먹으려고 하고 옹달샘의 물을 마시려고 할 때마다 “안 됩니다” 하고 말리더니 행례 후 신방까지 따라가서는 방바닥에 앉으면 안 된다며 총각을 마구 밀어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총각은 이 종놈을 죽여 버리겠다고 호통쳤는데, 몸종은 죽을 때 죽더라도 할 말이 있으니 그 말을 하고 죽겠다고 하고는 그제야 자초지종을 밝혔다. 총각은 자기 집 벽장 안에 있던 궤짝에서 이야기를 적은 종이를 꺼내 불태워버렸다.

우리의 오래된 관념 속에 ‘사(邪)가 된 재물’이란 게 있다. 오래 묵힌 것은 사악한 성질을 갖게 되어 인간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도깨비도 그래서 생겨난다. 창고 속 버려진 빗자루 같은 게 도깨비가 되어 버린다. 총각은 어디선가 듣고 온 재미난 이야기를 적어 궤짝 안에 넣어 두었는데 그게 그만 사가 되고 말았다. 너무 오랫동안 바깥 바람을 쐬어 주지 않고 궤짝 안에 담겨 있기만 했기 때문이다.

궤짝 안에 고이 모셔둔 이야기는 보물이 될 수 없다. 바깥바람을 쐬어 주고, 풀어내고, 나누어야 진짜 보물이 된다. [사진 piqsels]

궤짝 안에 고이 모셔둔 이야기는 보물이 될 수 없다. 바깥바람을 쐬어 주고, 풀어내고, 나누어야 진짜 보물이 된다. [사진 piqsels]

황금열쇠가 눈밭 속에서도 소년의 눈에 띄었던 것은, 이제 드디어 세상에 선을 보일 때가 되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무엇이? 이야기가. 황금열쇠를 꽂아 이제 막 문을 열려고 한 그 궤짝 안에 들어 있는 보물은 필시 ‘이야기’일 것이다. 이 이야기가 그림 민담집의 가장 마지막에 실려 있다는 것은, 그때까지 실컷 이야기를 풀어 놓고는 이제야 겨우 이야기 가득한 궤짝을 열어볼 열쇠를 갖게 되었음을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궤짝 안에 고이 모셔둔 이야기는 보물이 될 수 없다. 바깥바람을 쐬어 주고, 풀어내고, 나누어야 진짜 보물이 된다. 마음속 고이 모셔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황금열쇠를 가진 누군가 나타나서 내 마음에 단단히 걸어 잠긴 빗장을 철커덩 열어젖혀 줄 수 있다면, 마음에 고여 있던 수많은 이야기는 바람도 쐬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가닿기도 하면서 그때야 힘을 내기 시작하고 진짜 보물이 된다.

혹은 그 열쇠는 내가 스스로 만들어낼 수도 있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나누고 공감하면서 함께 호흡하면 어느새 내 손에 황금열쇠가 주어져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럼 이제 우리는 그 열쇠를 자물쇠 안에 집어넣고 한 바퀴 돌려주면 될 것이다. 철커덩, 마음의 빗장을 열어젖힐 황금열쇠를 지금부터 찾아 나서 보려 한다.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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