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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시시각각

'조선구마사' 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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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고증 미비, 역사 왜곡 논란 등으로 시청자 불만이 쏟아져 2회 만에 전격 폐지된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 충녕대군이 바티칸에서 온 구마 사제에게 중국음식인 월병·피단 등을 대접하는 장면.     [사진 SBS ]

고증 미비, 역사 왜곡 논란 등으로 시청자 불만이 쏟아져 2회 만에 전격 폐지된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 충녕대군이 바티칸에서 온 구마 사제에게 중국음식인 월병·피단 등을 대접하는 장면. [사진 SBS ]

첫 방송에서 폐지까지 불과 4일,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역사 왜곡 논란과 반중 정서로 시청자 불만이 쇄도해 2회 만에 전격 종영한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 얘기다. 온라인 논란에서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민원, 청와대 국민 청원, 광고주 압박까지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조선구마사’는 악령에 씐 조선 태종과 왕자들이 악행을 벌이고 바티칸에서 온 가톨릭 구마 사제들의 도움을 받는다는 판타지 엑소시즘 사극이다. 어차피 현실과는 거리가 먼 얘기지만 중국풍 소품과 의상 등 고증 문제, 살인마가 된 태종이나 '성군의 표상'인 충녕대군(세종)에 대한 부정적 묘사가 반감을 샀다. 드라마 제작사의 모회사인 YG엔터테인먼트에 중국 자본이 들어와 있고, 극본을 쓴 박계옥 작가가 한·중 합작 제작사와 계약관계라는 것도 논란을 키웠다. ‘차이나 머니’를 통한 ‘문화 동북공정’의 일환, 혹은 악의적인 한국 역사 폄훼 의혹이 나왔다.
 제작사는 "판타지 퓨전 사극으로 실존 인물을 차용해 공포의 현실성을 전하며 판타지적 상상력에 포커스를 맞추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재해석과 비틀기는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문제의식도 맥락도 없이 그저 ‘현실적 공포감’을 위해 역사를 들러리로 세우는 것은 다른 문제다. 박계옥 작가는 전작 ‘철인왕후’(tvN)에서도 현대 남성이 조선 왕비의 몸 안에 들어가는 ‘트렌스젠더 상황’ 등 독특한 설정을 선보였지만, 실존 인물을 고수해 역사 왜곡 시비에 휘말렸다. 사극 장르에 대한 안이한 인식을 보여준다.
 국내 반중 감정이 이 정도였나 놀라는 분위기지만 사실 민족주의·애국주의로 무장한 한·중 네티즌의 갈등은 뿌리가 깊다. 중국에서는 수년간의 동북공정, 한한령(限韓令)에 이어 김치나 한복의 원조가 중국이고('한국=문화도둑'이란 프레임이다), 윤동주 시인도 중국인이라는 주장이 퍼져 있다. "중국 공산당의 지지 아래 온라인을 이용해 맹목적으로 애국하고 광적으로 외국을 배척하고 자유주의적 지식인을 공격하는 중국 분노 청년의 활약"이다(『중국 애국주의 홍위병, 분노청년』). 중국 고대문명을 전부 동이족이 만들었다는 우리 유사 역사학자들의 주장도 여론을 악화시켰다. 한국에 출시된 중국 게임이 한복과 갓을 한국 전통이라고 소개했다가 중국 네티즌의 반발로 중국산이라고 정정하고, 다음엔 한국 네티즌이 불매운동을 벌인 일도 있다.
 중국 정부는 '혐한' 정서를 부추기고, 한국에서는 정부가 중국에 저자세라는 반감이 '반중' 정서를 더 자극한다. 양국의 '분노 청년'들이 온라인에서 일대 민족주의 문화전쟁을 벌이는 형국이다. 문제는 비이성적인 '온라인 중화주의'를 비판하다 그를 닮아갈 우려다. 박계옥 작가나 엽기적 아기 바꿔치기 사건의 주인공인 '구미 모녀'가 중국동포라는 근거 없는 주장과 함께 중국동포 혐오가 커진다. 단지 중국 원작이라는 이유로 아직 방영도 되지 않은 드라마들에 '역사 왜곡' 딱지를 붙이는 일도 벌어진다. 인터넷에는 '역사 왜곡 매국 드라마 대처법'이라며 향후 행동 지침까지 올라와 있다. 광고주 손절 효과를 확인한 이번 드라마처럼 "방통위 민원 소용없다. 돈줄을 잘라라. 자본주의에서는 금융 치료가 최고"라는 글도 보인다.
 압권은 "역사 왜곡 심의를 강화해 방송사 재허가·재승인에 반영하겠다"는 이원욱(더불어민주당)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의 발언이다. 원론적 발언이고 무분별한 역사 왜곡이야 문제지만, 자칫 창작의 자율을 해치고 역사를 비트는 상상력에 재갈을 물려 한류의 자산인 드라마 제작에 퇴행적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다. 넷플릭스에는 백인 중심의 역사에 대한 도전으로 19세기 영국 왕비와 일부 귀족을 흑인으로 설정해 세계적으로 흥행한 '브리저튼'이란 영국 드라마가 있다. '조선구마사' 사태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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