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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가 변심했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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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창규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김창규 경제에디터

김창규 경제에디터

얼마 전 대기업 입사 2년차 직장인을 만났다. 대화하던 중 우연히 재테크 이야기가 나왔다. “앞으로 결혼도 하고 집도 사려면 저축을 열심히 해야겠네요.” 이런 말을 건넸더니 그의 반응에 당혹스러웠다. ‘이건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한참을 쳐다봤다. 그런 다음 말을 받았다. “당장 결혼할 생각도 없고 집값이 이렇게 비싼데 어떻게 집을 사겠어요? 그리고 저축은 아예 안 해요.” 그는 월급에서 생활비를 뺀 여윳돈으로는 매달 주식을 몇 주씩 산다고 했다. 이렇게 ‘주식 적금’을 한 지 1년이 넘었다고 했다.

지난해 20대 주식투자 세배 늘어 #내집마련 사다리 끊겨 대안 찾기 #생활 힘들어지니 지지 않는 것

그에게 재테크를 물어보고 나선 “꼰대 같은 질문을 했구나”하고 후회했다. 그래도 20대의 주식투자가 급증했다는 걸 알았지만 저축 대신 주식 투자를 한다는 말에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사실 20대 투자자는 2019년 38만명(중복계좌 제외)에서 지난해 108만명으로 182%나 늘었다. 요즘 이들 사이에선 가만히 있으면 ‘벼락 거지’가 된다는 말이 유행한다. 심지어 생활비 대출을 받아 주식 투자에 나서는 대학생도 늘고 있다고 한다. 현금으로 대출받는 데다 이자율도 낮고 사용처도 밝힐 필요가 없어서다.

20대에 주식 투자 열풍이 불자 직원을 관리해야 하는 기업 간부에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업무는 뒤로하고 증권 앱만 쳐다보거나 단타 매매에 몰입하는 직원이 늘고 있어서다. 한 대기업 임원은 “10년차 미만의 직원은 거의 대부분이 주식이나 가상화폐 투자를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개인이 투자하는 건 뭐라 할 순 없지만 이렇게 투자를 하다가 주식 중독 등으로 사고를 치는 직원이 나올까 조마조마하다”고 걱정했다. 지난해 주식·가상화폐 투자 중독으로 상담소의 문을 두드린 20대는 전년의 세 배에 달한다. 투자 원금을 잃고도 빚을 내 무리하게 투자하기를 반복한 젊은이가 대부분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20대의 주식 투자는 일부에 국한됐다. 그런데 요즘엔 직업이 있건, 없건 수많은 20대가 주식 시장으로 몰려간다. 이 때문에 지난해 3월 국내 주식거래 계좌 수가 3000만개를 넘어선 지 불과 1년 만에 4000만개를 돌파했다.

서소문포럼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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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코로나19로 시장에 돈이 넘쳐나는 것도 있지만 국내 부동산값 급등이 첫 번째 손가락에 꼽힌다. 예전엔 차근차근 저축해서 전셋값을 마련하고, 또 돈을 모으고 대출받아 집을 사는 ‘내 집 마련 사다리’가 있었다. 하지만 최근 집값 급등으로 이 사다리가 끊어졌다. 여기에 청년 일자리마저 급감했다. 아끼고 저축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지자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겠다는 절박함만 남았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가 지난해 24~39세를 대상으로 설문해 보니 응답자 3명 중 1명(31%)은 재무목표 1순위로 ‘주택구입 재원 마련’을 꼽았다. 하지만 이들에게 내 집 마련은 ‘먼 나라’ 얘기다. 노동자가 근로소득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도 서울의 83㎡(약 25평) 아파트를 사려면 36년이 걸린다(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1월). 근로소득만으로는 사실상 내 집 마련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러다 보니 주머니를 탈탈 털어 주식 시장으로 간다. 20대 10명 중 4명(40%)은 가장 좋은 재테크 수단으로 주식을 꼽는다(한국경제연구원 3월 조사). 다른 세대가 선호하는 부동산(27.6%)보다도 훨씬 많다.

20대가 핵심을 차지하는 MZ세대(1980년~2000년대 초반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2000년대 초반 출생한 Z세대)의 특징은 유연함이다. 상황에 따라 변하고 자연스럽게 융화한다. 그렇다 보니 직장을 평생 몸담을 곳으로 생각하지 않고 거쳐 지나가는 정류소쯤으로 여긴다.

지지 정당도 마찬가지다. 사회 참여는 기존 세대와 다른 방식이지만 적극적이다. 내 집 마련이 어려워지자 주식 투자에 뛰어드는 것도, 특정 국가나 브랜드 제품의 불매운동에 나선 것도, 역사 왜곡 논란이 된 드라마의 방영 중단을 청원하는 것도 이런 특징 때문이다. 또 삼성전자·SK하이닉스·네이버·카카오 등 주요 기업에서 임금 불만이 공개적으로 불거지는 것도 MZ세대의 성향에서 나온다.

요즘 정치권에선 20대의 지지가 여당에서 야당으로 이동했다고 ‘20대의 역사 경험치가 낮다’는 말까지 등장해 논란이다. 여든, 야든 지지율을 자당에 유리하게 해석한다. 하지만 본질은 20대는 변심하지 않았다는 거다. 거창하게 공정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힘들고 불편하게 하니 대안을 찾은 거다. 그게 MZ세대다.

김창규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