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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 6일만에 뚫렸지만…세계 '무역 동맥경화'는 60일 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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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도미노는 이미 넘어갔다.”

이집트 수에즈 운하에 좌초됐던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가 29일(현지시간) 다시 물에 떠 사고 현장을 떠난 모습.[AFP=연합뉴스]

이집트 수에즈 운하에 좌초됐던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가 29일(현지시간) 다시 물에 떠 사고 현장을 떠난 모습.[AFP=연합뉴스]

해운정보서비스 기업 시인텔리전스컨설팅의 라르스 옌슨 최고경영자(CEO)가 29일(현지시간) 블룸버그 통신에 한 말이다. 초대형 화물선 ‘에버기븐호’ 좌초 사태 6일 만에 수에즈 운하 통행은 재개됐지만, 글로벌 ‘무역 동맥경화’는 당분간 돌이킬 수 없다는 얘기다. 발이 묶였던 배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면서 전 세계 뱃길과 항구에 병목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어서다.

미국 CNBC 방송 등에 따르면 수에즈 운하 남쪽에 좌초됐던 에버기븐호는 이날 물에 완전히 떠 사고 현장을 벗어났다. 운하 밖에 발이 묶였던 선박들도 이후 통행에 나섰다.

무역 혼란 도미노 이미 시작  

지난해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 항구에 쌓여있는 컨테이너.[AFP=연합뉴스]

지난해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 항구에 쌓여있는 컨테이너.[AFP=연합뉴스]

큰 불은 껐지만, 일주일의 공백이 글로벌 공급망에 만든 후폭풍은 적지 않다. 수에즈 운하는 전 세계 교역량의 12%, 전 세계 해상 석유 운송의 10%를 담당한다. '수에즈 운하 발(發)' 물류 대란이 수개월 간 이어질 것이란 우울한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우선 선박들이 수에즈 운하를 지나는데 걸리는 시간이 만만치 않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이날 기준 수에즈 운하에서(양방향 기준) 발이 묶인 선박은 453척이다. 오사마 라비 수에즈운하관리청(SCA) 청장은 이날 “대기 선박이 빠질 때까지 약 사흘 반 정도가 걸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지난 27일 수에즈 운하 남쪽 홍해에서 운하 통과를 위해 대기 중인 선박들의 모습.[AFP=연합뉴스]

지난 27일 수에즈 운하 남쪽 홍해에서 운하 통과를 위해 대기 중인 선박들의 모습.[AFP=연합뉴스]

하지만 해운업계 생각은 다르다.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 운영사인 덴마크 머스크는 “(대기 중인) 배들이 운하를 통과하는 데 6일 이상 걸릴 수 있다”고 밝혔다. 시장조사기업 레피니티브는 “(수에즈 운하에서) 밀려 있는 선박의 통항이 정리되기까지 열흘 넘게 걸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일부 해운업계 베테랑들은 몇 주간의 지연을 예상한다”고 보도했다.

수에즈 후폭풍, 최대 수개월 지속

지난 29일 독일 함부르크 항구에 정박중인 대형 컨테이너선.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9일 독일 함부르크 항구에 정박중인 대형 컨테이너선. [로이터=연합뉴스]

수에즈 운하가 제 모습을 찾더라도 글로벌 물류망 정상화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도착일이 늦어진 각 선박이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속도 경쟁을 벌일 경우 전 세계 뱃길과 항구에서 병목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컨테이너 터미널 및 바지선, 도로, 철도를 포함하는 내륙 물류 시스템의 압박도 커진다.

더글러스 켄트 공급망관리협회(ASCM) 부회장은 “수에즈 운하 항행이 재개돼도 항구와 물류 메커니즘 혼란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2위 해운선사인 스위스 MSC의 캐롤라인 베카르트 수석부사장도 “각 항구에 도착하는 선박이 평소보다 급증해 물류 혼잡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시장에선 글로벌 물류망이 완전히 정상화되기까지 두 달 이상이 걸릴 거란 예측이 나오고 있다. 머스크는 “물류망이 완전히 정리되기까지는 여러 달이 걸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스티븐 플린 미국 노스이스턴대 교수도 “글로벌 물류망은 최소한 60일은 있어야 타격을 회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라르스 옌슨 CEO는 “아프리카 희망봉 항로로 우회한 배들 일정까지 따지면 타격은 더 길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수에즈운하 사태로 인한 피해 규모 추산치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블룸버그 등 외신종합]

수에즈운하 사태로 인한 피해 규모 추산치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블룸버그 등 외신종합]

글로벌 공급망 혼란은 각국 제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다. 플린 교수는 “부품을 예상 납기일에 받지 못한 기업들이 생산라인 가동을 멈추는 등 향후 여파가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블룸버그는 “소비재와 산업재, 상품 등의 분야에서 아시아 수출업자와 유럽 수입업자가 가장 큰 피해를 볼 것”이라고 분석했다.

해운업계 ‘선박 규모 지상주의’ 문제 키워  

29일(현지시간) 이집트 수에즈 운하에서 예인선들이 좌초됐던 에버기븐호를 옮기고 있다. 에버기븐호는 2만TEU(1TEU는 컨테이너 1개분 화물)급 초대형 화물선이다.[AFP=연합뉴스]

29일(현지시간) 이집트 수에즈 운하에서 예인선들이 좌초됐던 에버기븐호를 옮기고 있다. 에버기븐호는 2만TEU(1TEU는 컨테이너 1개분 화물)급 초대형 화물선이다.[AFP=연합뉴스]

해운업계의 ‘선박 규모 지상주의’가 이번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프랑스 해운조사기관 알파라이너의 스테판 베르베르뫼 선임 분석가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1990년대 이후 세계 무역 규모가 커지자 해운업계는 더 큰 선박을 만들기 위해 경쟁했다”며 “초대형 화물선의 크기가 지난 25년 동안 4배로 커졌다”고 말했다. 한 번에 많은 양의 물건을 실어 비용을 절감하려는 움직임 탓이다.

비용은 줄일 수 있지만 사고 위험은 커졌다. FT는 “초대형 화물선에 컨테이너를 높이 쌓으면 강풍에 취약하고, 폭을 키워 넓게 쌓으면 항구와 운하 등 좁은 공간에서 조종하기가 어려워진다” 며 “무게까지 늘어 사고 위험은 더 커졌다”고 지적했다. 이번에 좌초한 에버기븐호 역시 2만TEU(1TEU는 컨테이너 1개분 화물)급 초대형 화물선이다.

게다가 초대형 화물선을 수용할 수 있는 항구는 전 세계에 그렇게 많지 않다. CNBC는 “초대형 화물선에 실린 물품은 각 항구에서 유럽이나 미국 등으로 가는 더 작은 배로 옮겨진다”며 “이번처럼 선박 운항이 1주일 가까이 중단되면 화물 적체 문제는 매우 커질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에어기븐 사태로 인해 초대형 항공기가 퇴조하고 중형 항공기가 대세가 된 항공시장처럼 해운업계에도 변화의 바람일 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쇠렌스코우 머스크 CEO는 FT에 “(항공업계에서) 지난 수십년간 최적의 여객기 크기는 보잉 747이었다”며 “해운업계가 가야 할 길”이라고 말했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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