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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권남용 확대한 이민걸 재판부…판도라 상자 열었다

중앙일보

입력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연루된 법관들에게 첫 유죄 선고를 내린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부장판사 윤종섭)의 결론을 두고 법조계에서 논란이 분분하다. 형사32부가 이번 재판의 최대 화두인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에 대해 기존 대법원 판례를 확장한 ‘새로운 해석론’을 냈기 때문이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12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 의혹과 관련해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해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12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 의혹과 관련해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해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① 대법 판례 확장해석

앞서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일반적 직무 권한에 속하는 사항에 관하여 직권을 행사하는 모습으로 상대방에게 실질적·구체적으로 위법·부당한 행위를 한 경우’ 성립한다. ‘직권’을 공무원의 일반적 직무 범위에 속하는 사항으로 한정한 셈이다.

형사32부는 여기서 나아가 ‘직권’의 폭을 넓게 해석했다. 대법원 판례처럼 일반적 직권 범위 내에서 직권을 남용한 사례(직권의 재량적 남용)는 물론이고 일반적 직권과 상당한 정도의 관련성이 인정되는 경우(직권의 월권적 남용)도 직권남용죄에 포함해야 한다고 봤다.

재판부는 “일반적 직권에 속하는 사항에 관련됐다는 ‘관하여’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며 “대법원 판례의 여러 사안을 보면 직권남용죄가 인정된 사안이 모두 일반적 직권의 ‘정당한 범위 내에서’ 행해진 사안인 것은 아니고 일반적 직권에 속하는 사항과 ‘관련하여’ 행해진 사안도 여럿 있기 때문”이라고 판시했다.

② ‘지적’은 대법원장ㆍ법원행정처 권한

재판 개입에 대한 ‘직무 권한 성립 여부’도 중요한 대목이다.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사실이 있어야 성립하는데 이를 판단하려면 공무원이 해당 직무 권한을 가졌는지부터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임성근 전 부장판사에 대해 1심 재판부는 “법관의 독립 원칙에 따라 사법행정권자에게는 재판 업무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고 봤다. 재판 개입을 행정처의 권한으로 보게 되면 헌법상 법관 독립 원칙을 부정하는 결과가 나오는 만큼 죄가 성립할 수 없다는 의미다.

서울중앙지법. 연합뉴스

서울중앙지법. 연합뉴스

형사32부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재판 사무의 핵심 영역에 대한 ‘지적’은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사무에 해당한다”면서도 “명백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라고 하는 등 권고하는 것은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가 할 수 없다고 본다”고 했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는 재판에 대한 ‘지적 권한’을 갖지만 재판부에 ‘권고’할 경우 권한을 벗어나 직권남용이 성립된다고 본 셈이다.

법관 독립 원칙을 위배한다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재판 독립은 중요하지만 직업적으로 충분히 단련되지 못한 법조인이 판사가 되거나 나태한 판사가 있을 수 있어 입법자가 마련한 제도만으로는 부족한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며 “이러한 일이 최대한 적게 일어나도록 특정 사건 재판 사무의 핵심 영역에 대한 지적 사무의 ‘존재’가 필요하다”며 지적 권한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③‘권고’가 직권남용인 이유? 

윤 부장판사는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인사권’이 판사들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권리 행사를 방해한다고 봤다. 재판부는 “판사들은 대법원장의 인사권을 염두에 두기 마련이어서 대법원장의 권고를 제쳐두고 재판사무를 수행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해당 논리는 지난 2019년 1월 서현석 전직 부장판사가 법원 내부망인 ‘코트넷’에 올려 지적한 부분이기도 하다. 서 전 부장판사는 “공무원은 주권자인 국민 전체의 의지의 표시인 법령을 준수해야할 의무가 있다”며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는 것이므로 (법관 인사권자나 인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법원장의 부당한 청탁)을 따를 의무 자체가 없다”고 설명했다.

이를 두고 법원 내부에선 직권남용죄에 대한 범위를 무리하게 확장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수도권에 위치한 한 부장판사는 “직권 범위가 넓어져서 대한민국 공무원이면 다 잡힐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놨다”며 “향후 직권남용이 무리하게 적용될 가능성 또한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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