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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현곤 칼럼

LH 수렁에 빠진 정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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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사원용 아파트를 빼돌려 분양받은 사회지도층 600여 명을 적발하고, 40여 명은 구속·파면했다.’ 1978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압구정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이다. ‘투기는 불공정의 형제이며 악행의 아버지다’(조지 워싱턴). 백번 맞는 말이지만, 탐욕은 인간의 본성. 투기가 끊이지 않는다. 90년 1차 신도시(분당·일산), 2005년 2차 신도시(검단·동탄) 때도 후보지마다 난장판이 됐다. 예나 지금이나 파렴치하고, 수법도 비슷하다. LH 사태도 수많은 투기 사건의 하나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예전과 사뭇 다르다. 4·7 선거판을 단숨에 흔들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선거개입 논란에도 가덕도까지 가서 “가슴이 뛴다”고 한 게 무색해졌다. 왜 이렇게 됐을까. 우선, 부동산 정책 실패로 집값이 너무 올랐다. 서울 25평 아파트값은 이 정부에서 6억6000만원에서 11억9000만원으로 뛰었다(경실련). 국민이 참다 참다 폭발한 것이다. ‘마지막 지푸라기가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다’는 서양 속담처럼.

LH 특권층, 공허한 민심에 불질러 #‘난 노력해도 안 되는데, 넌 뭐냐’ #이 정권 사람들 똑같은 특권층일 뿐 #대통령 유체이탈·갈라치기 안 통해

일도 없고, 집도 없는 젊은이들은 결혼을 포기한다. 지난해 결혼은 21만3500건으로 70년 통계 작성 이래 최저치다. “주거나 고용 등 여건이 어려워지면서 만혼, 비혼이 늘고 있다”(통계청 인구동향과장). 오피스텔이나 원룸을 어렵사리 구해 결혼해도 아이를 안 낳는다. 아니, 키울 엄두가 안 나 못 낳는다. 세계 최저 출산율(2020년 0.84명)의 원인 중 하나가 집 문제다. 25~49세 국민은 이상적인 자녀 수를 2.05명이라고 생각한다(KDI 최슬기 교수). 이 소박한 꿈을 부동산이 막고 있다. 세계 10위권 부자 나라의 가난한 젊은이들이다.

좌절감이 큰 만큼 공정에 민감하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데, 저 사람은 쉽게 하네.’ 이건 참을 수 없다. LH 직원이 블라인드 앱에 올린 경솔한 글이 기름을 부었다. ‘차명 투기하면서 정년까지 꿀 빨면서 다니련다.’ ‘꼬우면 우리 회사로 이직하든가. 공부 못해 못 와놓고.’ 차명 투기는 범법 행위다. 더 섬뜩한 건 익명 뒤에 숨어 있는 고약한 심성과 뒤틀린 우월감이다. 이쯤 되면 이런 공기업을 그냥 놔두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든다. 문 대통령의 경남 양산 사저도 불공정에 불을 질렀다. 농지 형질변경이 논란이 되자 그는 “좀스럽다”고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내로남불. 국민 입장에선 좀스러운 일이 아니다. ‘대통령은 쉽게 바꾸는데, 나는 왜 안 되나.’ “농지 취득 심사를 강화하라”는 29일 대통령 발언은 민망할 지경이다.

정부는 처음에 ‘정권과 LH는 별개’라고 선을 그었다. 현안에 대체로 침묵하는 문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신속했다. 즉각 “발본색원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유체이탈 화법으로는 성난 민심이 잦아들지 않는다. 그러자 임기 내내 즐겨 쓴 ‘갈라치기’를 시도했다. 문 대통령은 “불공정의 뿌리인 부동산 적폐를 청산하는 것이 국민의 요구”라고 말했다. 정세균 총리도 “권력, 자본, 정보, 여론을 손에 쥔 특권세력이 대한민국을 투기장으로 만들었다”고 거들었다. LH 사태를 과거 적폐의 탓으로 돌리면서, 책임지는 위치에서 단숨에 심판하는 위치로 프레임 전환을 꾀한 것이다. 2006년 노무현 정부 때 이백만 홍보수석이 “일부 건설업체와 중개업자, 금융회사, 언론 등 부동산 세력이 시장을 교란했다”고 책임을 떠넘긴 것과 비슷하다.

이번엔 갈라치기가 전혀 먹히지 않는다. 다급해지자 ‘투기=친일파’ 프레임에 “소급 몰수” “정치 유불리 따지지 말고 파헤쳐야”까지 나왔으나 여론은 싸늘하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탓하나. 이 정권 사람들이 바로 부동산 적폐 아닌가.’ 재개발 투기 의혹으로 사임한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 ‘직 대신 집’을 택한 김조원 전 청와대 민정수석. 양도세를 줄이려고 꼼수를 쓴 노영민 전 대통령비서실장. 목포시 차명 투기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은 손혜원 전 민주당 의원… 임종성·양향자·양이원영·윤재갑·김경만·서영석·김주영·김한정 등 하루가 멀다 하고 민주당 의원들의 투기 의혹이 나온다. ‘5% 상한’ 임대차보호법 시행 이틀 전에 전셋값을 14%나 올린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행보는 치명타다.

“위는 맑은데 바닥에 가면 잘못된 관행이 남아 있다”는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의 말은 불쾌하다. 위가 맑은지 여부는 차치하고, ‘자신들은 위, LH는 바닥’이라는 인식 자체가 오만하고 천박하다. LH 직원으로부터 조롱받는 국민은 바닥도 안 된단 말인가. 문재인 정권 4년을 겪으면서 국민은 죄다 알게 됐다. 그들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진보로 위장했지만, 권력과 정보를 탐욕스럽게 독점한 특권층이라는 것을. 조국·윤미향·박원순·오거돈 모두 진보 간판을 교묘하게 이용한 특권층이라는 것을. 78년 군사독재정권 시절 현대아파트를 분양받은 특권층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적어도 도덕적으로는 보수보다 좀 나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십보백보. 누가 적폐이고, 누가 정의인지 헷갈린다. 배신감을 느낀다. ‘이러려고 촛불을 들었나.’ 씁쓸하고 공허한 민심에 ‘정년까지 꿀 빨겠다’는 또 다른 특권층, LH가 불을 지른 것이다. LH 사태가 한 달 지나도록 잦아들지 않는 이유다.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