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공정 잘알못’ 진보 꼰대

중앙일보

입력 2021.03.30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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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형구 정치에디터

김형구 정치에디터

초등학교 5학년인 딸이 며칠 전 마을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 눈에 띄었다. 『어린이를 위한 정의란 무엇인가』. 초등학생 5명이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일을 놓고 공정과 정의 관점에서 어떻게 생각할지를 8가지 이야기로 다룬 것이었다. 대출받은 책은 제본이 해어져 금세라도 몇장이 찢겨나갈 것 같았고 모서리도 닳아 있었다. 그만큼 많은 아이들이 고사리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공정하다는 게 뭔지, 정의롭다는 게 어떤 건지 곱씹어봤겠구나 싶었다.

문 정부 건건이 발목잡은 공정이슈
기득권 된 86세대 “20대 경험부족”
“꼰대 반증”…성난 민심 되새겨야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가 지난 26일 20대 지지율이 낮은 이유를 얘기하다 “20대는 경험 수치가 낮지 않은가”라고 해 구설에 올랐다. 나중에 “진의가 왜곡됐다”며 수습하려 했지만 역풍이 만만치 않다.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은 페이스북에 “자기들이 경험 없을 때 민주화 운동 한 건 끝없이 우려먹으면서 지금 청년은 무식해서 판단력이 없다니”라고 비판했다. 관련 기사에 “돌멩이파들이 자신들 20대는 미화하면서 지금 20대는 애 취급한다. 나이 먹고 꼰대가 돼버렸다는 강력한 반증”이라는 댓글이 달렸다.

주지하다시피 현 정부의 아킬레스건이 된 건 대부분이 2030세대가 예민한 공정 이슈다. 대의 앞에 개인 희생 강요가 타당하냐는 물음을 던진 평창 동계올림픽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논란. 취업준비생들이 절차적 불공정성과 기회 박탈을 따져 물은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 논란. 나라를 둘로 가르며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 입시비리 의혹. 여기에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 땅 투기 의혹은 자산 불평등에 분노하는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면목 없는 일”이라면서도 ‘부동산 적폐’를 사태의 진원으로 지목한다. 부동산 문제가 뿌리 깊은 고질이라 하더라도, “그렇다면 집권 4년 동안 뭘 했느냐”는 게 장삼이사의 반응이다. 성난 민심을 달래거나, 등 돌린 민심을 붙들기 위한 해법과 거리가 멀었다는 얘기다.

2016년 “능력 없으면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라던 최순실씨 딸 정유라 이대 부정입학 사건 때 평등과 공정을 부르짖고, 정의를 레토릭으로 삼으며 출범한 이 정부에서 왜 이런 역설이 벌어졌을까. 정의를 진보의 전유물로 여기는 편협함 때문 아닌가. 애초 공정과 정의에 대한 시각 자체가 어디서부턴가 뒤틀려 있었던 것 아닌가. 피아(彼我)간 전선이 단순했던 시대 아스팔트 저항운동을 경험한 86그룹이 이분법적 정의관으로 지금의 젊은 세대를 가르치려 들었던 것 아닌가.

서소문포럼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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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과 정의 담론은 이슈마다 다양한 가치가 충돌한다. 세대별로도 받아들이는 의미가 천차만별일 만큼 다면적이고 복잡해졌다. 지난 11일 자 중앙일보 1면 기사 ‘경제 최고 가치는 공정. LH 투기, 그걸 건드렸다’에서 소개됐는데,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은 “과거 불공정이 사회적 강자들의 비리나 착취에 가까운 개념이었다면 현재는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문제를 포괄할 정도로 스펙트럼이 넓다”고 했다.

이른바 ‘윤석열 현상’도 법치와 엄정으로 상징되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대비되는 현 정부의 불공정성에 대한 공분이 동력이다. 그런데 여권 인사들의 현실 인식은 그동안 어땠나. 2년 전 떠나가는 20대 민심을 두고 “전 정부에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탓”(설훈 민주당 의원), “지난 정권에서 1960~70년대 박정희 시대를 방불케 하는 반공 교육으로 아이들에게 적대감을 심어줬기 때문”(홍익표 민주당 정책위의장)이라며 전 정권 탓을 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나온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박원순 예찬’은 2차 가해 논란을 무릅쓰고라도 친여 지지층 결집에 베팅하는 왜곡된 정의관이 빚은 사고로 보인다.

이들을 향해 성난 2030세대가 부르는 이름이 ‘진보 꼰대’다.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남을 가르치려 드는 데가 있다’. 국립국어원이 소개하는 형용사 ‘꼰대스럽다’의 정의다. 더는 약자가 아니고 기득권 세력이 된 현 정권 사람들이 말뜻을 겸허하게 되새겨야 할 때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어린이를 위한 정의란 무엇인가』에 소개된 다섯 번째 이야기는 아빠 혼자 자녀를 키우는 가정을 위한 ‘부자(父子)보호 지원 센터’ 설립을 놓고 동네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찬반 논란을 다뤘는데, 주제는 ‘다수결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다. 책은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정당한 권리를 무시해도 되는 걸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소수에 대한 다수의 횡포’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라고 적고 있다. ‘180석의 힘’을 종종 과신하는 여권에 딱 들어맞는 얘기 같다.

김형구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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