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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사장이 이사회 결의 없이 빚 보증, 그돈 물어줘야 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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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박용호의 미션 파서블(11)

우리나라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재벌가. 드라마에서는 재벌가 회장이 가정뿐 아니라 회사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재벌 회장이 그룹 내 계열사의 경영에 사실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별론으로, 법률상으로는 아무리 재벌 회장이라도 그룹 내 모든 회사의 의사결정을 할 수는 없다.

상법상 주식회사의 의사결정 권한은 주주총회와 이사회에 있고, 주식회사의 업무집행권와 대표권을 가지는 것은 각 회사의 주주총회·이사회에서 선출된 대표이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벌 회장이 각 계열회사의 이사 또는 대표이사로 선임되지 않는 이상 각 주식회사의 의사결정을 하거나 업무집행을 할 수 없다.

그럼 어떤 사람이라도 주주총회와 이사회를 거쳐 대표이사로 선임되기만 하면, 이사회 결의 없이도 마음대로 거래를 할 수 있는 것일까. 좀 더 구체적으로 대표이사가 이사회 결의가 필요한 사항에 대해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고 거래를 하더라도, 그 거래는 유효한 것일까. 아래 사례를 통해 알아보도록 한다.

상법상 주식회사의 의사결정 권한은 주주총회와 이사회에 있다. 대표이사가 이사회 결의가 필요한 사항에 대해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고 거래를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사진 pixabay]

상법상 주식회사의 의사결정 권한은 주주총회와 이사회에 있다. 대표이사가 이사회 결의가 필요한 사항에 대해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고 거래를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사진 pixabay]

A회사는 전기공사를 하는 회사다. 시공사인 B회사는 시행대행사인 C회사와 대규모 토지구획정리사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A회사는 위 사업의 전기공사 등을 수주받고 싶었다. 마침 B회사의 대표이사 D는 A회사가 사업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C회사에 30억원을 대여해 줄 것을 부탁했다. A회사는 향후 전기공사를 수주받을 의향으로 C회사에게 30억원을 빌려주었고, 대신 B회사 대표이사 D로부터 확인서(C회사가 30억원을 갚지 못하면 B회사가 대신 갚겠다는 취지)를 받았다. 이후 C회사가 돈을 갚지 않자, A회사는 위 확인서를 근거로 B회사가 보증인으로서 30억원을 갚으라고 요구했다. B회사 이사회 규정에는 ‘다액의 자금도입 및 보증행위’를 이사회 결의사항으로 정하고 있었는데, 대표이사 D의 확인서 작성 당시 B회사 이사회의 결의는 없었다. B회사는 대표이사 D의 확인서 작성 당시 이사회 결의가 없었음을 이유로 돈을 못 갚겠다고 버티고 있다.

이사회 결의 없는 대표이사 거래의 효력

주식회사의 대표이사는 회사의 영업에 관해 재판상 재판외의 모든 행위를 할 수 있다. 대표이사의 권한은 제한할 수 있으나, 그 제한은 그 제한을 알지 못하는(선의) 제3자에게는 대항할 수 없다(상법 제389조 제3항, 제209조 제2항). 다시 말해 이 경우 회사와 제3자의 거래는 유효하다.

일정한 대외적 거래행위에 대해 이사회 결의를 거치도록 대표이사의 권한을 제한하는 경우 이사회 결의는 회사의 내부 의사결정 절차에 불과하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거래 상대방으로서는 회사의 대표자가 거래에 필요한 회사의 내부절차를 마쳤을 것으로 신뢰하는 것이 경험칙에 부합한다(대법원 2009. 3. 26. 선고 2006다47667 판결 등). 따라서 회사 정관이나 이사회 규정 등에서 이사회 결의를 거치도록 대표이사의 대표권을 제한한 경우에도 이를 알지 못한 제3자는 상법 제209조 제2항에 따라 보호된다(그 거래는 유효).

만약 이사회 결의가 필요한 거래에 대해 이사회 결의가 없었음을 상대방이 알지 못한 데에 과실이 있다면 어떨까. 이와 관련해 대법원의 기존 입장은 이사회 결의를 거쳐야 할 대외적 거래행위와 관련해 거래 상대방인 제3자가 보호받기 위해서는 제3자가 이사회를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지 못하고(선의), 알지 못한 데에 과실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표이사가 행한 거래라 해도 거래 상대방에게 중대한 과실이 없는 이상 유효하다. 회사와의 거래 안전이 좀 더 강하게 보호된다는 이야기다. [사진 pixabay]

대표이사가 행한 거래라 해도 거래 상대방에게 중대한 과실이 없는 이상 유효하다. 회사와의 거래 안전이 좀 더 강하게 보호된다는 이야기다. [사진 pixabay]

그런데 최근 대법원은 앞서 언급한 사례처럼 대표이사가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고 거래를 한 경우 그 상대방이 보호받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무과실까지는 필요하지 않지만, 상대방에게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경우 그 상대방의 신뢰를 보호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보아 거래행위가 무효라고 판단했다(대법원 2021. 2. 18. 선고 2015다45451 판결). 여기서 ‘중대한 과실’이란 제3자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이사회 결의가 없음을 알 수 있었는데도 만연히 이사회 결의가 있었다고 믿음으로써 거래통념상 요구되는 주의의무를 현저히 위반하는 것으로, 거의 고의에 가까운 정도로 주의를 게을리해 공평의 관점에서 제3자를 구태여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볼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대법원 2015다45451 판결에 따르면 거래상대방에게 중대한 과실이 없는 이상 이사회 결의가 없이 대표이사가 행한 거래라 하더라도 유효하고, 이로써 회사와의 거래안전이 좀 더 강하게 보호될 수 있게 되었다.

회사와 거래를 하는 경우 유의사항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회사와 거래하는 경우 대표이사가 그 거래당사자라 하더라도 이사회 결의 유무, 그에 대한 인식 여부 등에 따라 그 거래가 추후 무효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회사와 거래를 하는 경우 회사의 자본금·자산·매출 규모·거래를 통해 회사가 부담하게 되는 위험의 정도 등에 비추어, 그 거래에 이사회의 결의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꼼꼼히 살펴보고, 만약 회사의 거래에 이사회 결의가 필요한 것으로 판단되면 거래완료 전 이사회 결의가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변호사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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