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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피해자다움이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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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태인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박태인 JTBC 기동이슈팀 기자

박태인 JTBC 기동이슈팀 기자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스토킹범죄의 피해자였다. 피해를 당하면서도 왕성히 의정 활동을 했지만 속은 곪아갔다. 박 의원의 고소대리인을 맡았던 양홍석 변호사는 “국회의원 신분이라 고소를 안 하려 했으나, 고통이 엄청나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박 의원은 지난 15일 스토킹처벌법 통과를 촉구하며 “패닉 상태에 빠질 뻔한” 기억을 공개했다. 스스로 밝히지 않았다면 아무도 몰랐을 사실이다. 박 의원의 부인 행세를 했던 가해자는 벌금형을 받았다. 스토킹처벌법은 논의 22년 만인 24일 국회를 통과했다.

박 의원은 스토킹범죄 피해자의 전형성을 벗어난 경우다. 스토킹 피해는 남성보단 여성이, 힘있는 자보단 힘없는 자가 당한다. 국회 회의록을 보면 “스토킹·데이트 폭력 범죄로 살해되거나, 살해 미수 피해 여성이 작년만 31명(송민헌 경찰청 차장)”이라고 나온다. 박 의원처럼 가해자의 접근을 막아줄 수 있는 8명의 보좌진이 있는 피해자는 드물다. 박 의원은 이른바 ‘피해자다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를 ‘피해 호소인’이라 부르는 여당 의원은 없다. 가해자가 있고 말 못할 고통이 존재했기에 박 의원은 엄연한 피해자다.

지난 17일 열린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회견에 마련된 피해자의 자리. [연합뉴스]

지난 17일 열린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회견에 마련된 피해자의 자리. [연합뉴스]

스토킹 범죄로 딸과 어머니를 잃은 유가족을 만나면 피해자가 겪은 고통의 무게를 뒤늦게 알게 된 경우가 많다. 피해자들은 내 존엄을 지키려 피해를 당하면서도 일상을 유지했다. 그 역시 피해자의 일부분이지만 법정에 선 가해자들은 “피해자답지 않다”고 공격했다. 메신저의 이모티콘까지 물고 늘어졌다. 2018년 대법원은 피해자를 피해자다움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성인지 감수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여성들이 2차 가해를 당하고 있다.

최근 한 언론사의 기자가 고 박원순 시장의 성범죄 피해자에 관한 책을 냈다. 박원순 사건의 진상을 밝힌다는 346쪽의 책에는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않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으로 읽히는 대목이 있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까지 SNS에 공유한 이 책은 박 전 시장의 지지자들에게 무기처럼 쓰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책이 나오고 여권 유력 인사들이 아무리 박 전 시장을 옹호해도 그의 피해자가 피해자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성범죄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성범죄 피해만이 존재할 뿐이다. 피해자다움이 비집고 들어올 공간은 없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행 피해자인 김지은씨는 저서 『김지은입니다』에서 ‘피해자다움’이 가해자 측의 흔한 공격 논리이자 패턴이라 했다.

박 전 시장의 피해자는 자신이 “불쌍하고 가여운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라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존엄한 인간”이라 말했다. 피해자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피해자다움이란 없다.

박태인 JTBC 기동이슈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