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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세계인 울린 ‘라면왕’ 떠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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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농심 임직원들과 1982년 신제품 사발면을 맛보고 있는 신춘호 회장(가운데). 신 회장은 1965년 롯데공업을 창업, 라면사업에 뛰어들었다. [사진 농심]

농심 임직원들과 1982년 신제품 사발면을 맛보고 있는 신춘호 회장(가운데). 신 회장은 1965년 롯데공업을 창업, 라면사업에 뛰어들었다. [사진 농심]

‘라면왕’ 신춘호(사진) 농심 창업주 회장이 27일 영면에 들었다.  92세.

신춘호 농심 회장 #“한국인 라면 우리 손으로” 창업 #새우깡·짜파게티·신라면 직접 작명 #유언은 “세계 최고 품질로 키워라”

고(故) 신춘호 회장은 1930년 12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에서 태어났다. 5남 5녀 중 셋째 아들이다. 첫째가 롯데그룹 창업자인 고(故)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이다.

신춘호 농심 회장

신춘호 농심 회장

고인은 1958년 부산 동아대를 졸업한 뒤 신격호 회장을 도와 제과 사업을 시작했다. 고인은 당시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던 라면에 주목했다. 신격호 회장은 시기상조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고인은 롯데공업을 따로 차리고 라면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때부터 형제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형인 신격호 회장은 동생에게 ‘롯데’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결국 1978년 농심(農心·농부의 마음)으로 사명을 바꿨다. 이후 농심은 신라면과 새우깡 같은 히트작을 연달아 내놓으면서 굴지의 식품회사로 성장한다. 두 형제는 의절했고, 선친의 제사도 따로 지냈다고 한다. 다만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은 라면 시장으로의 직접 진출은 자제했다.

신라면이 최고 효자, 해외 매출만 4500억

고인은 1965년 라면 사업 진출 당시 “한국에서의 라면은 간편식인 일본과는 다른 주식이어야 한다”며 “값이 싸면서 우리 입맛에 맞고 영양도 충분한 대용식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인은 경영자인 동시에 연구자였다. “스스로 서야 멀리 갈 수 있다.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라면은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회사 설립 초기부터 연구개발 부서를 따로 두었다. 스스로를 ‘라면쟁이’ ‘스낵쟁이’라 부르며 장인정신을 주문했다.

신춘호 회장이 직접 작명해 농심을 식품회사로 성장시킨 대표 제품들. 왼쪽부터 유기 그릇으로 유명한 지역명에 제사상에 오르는 ‘탕’을 합성한 안성탕면, 어린 딸의 발음에서 영감을 얻은 새우깡, 신(辛)라면,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조합한 짜파게티. 마지막은 짜빠구리로 더 유명해진 ‘너구리’ 라면.

신춘호 회장이 직접 작명해 농심을 식품회사로 성장시킨 대표 제품들. 왼쪽부터 유기 그릇으로 유명한 지역명에 제사상에 오르는 ‘탕’을 합성한 안성탕면, 어린 딸의 발음에서 영감을 얻은 새우깡, 신(辛)라면,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조합한 짜파게티. 마지막은 짜빠구리로 더 유명해진 ‘너구리’ 라면.

유기 그릇으로 유명한 지역명에 제사상에 오르는 ‘탕’을 합성한 안성탕면이나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조합한 짜파게티, 어린 딸의 발음에서 영감을 얻은 새우깡 등의 명칭을 만든 것도 그다. 특히 1986년 출시한 농심의 역작 신라면에 깊은 애착을 보였다. 제품 이름에 고인의 성인 매울 신(辛) 자를 썼다. 고인이 “내 성(姓)을 이용해 라면을 팔아보자는 게 아니라, 매우니까 간결하게 ‘매울 신’으로 하자”면서 붙인 이름이다. 제품에 대부분 회사명이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신라면은 1991년부터 국내 라면 시장을 석권해왔다. 농심이 라면 업계 1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난해 신라면 해외 매출은 약 3억9000만 달러(약 4500억원)로 농심 전체 해외 매출의 40%에 이른다. 지난해 미국 뉴욕타임스는 신라면블랙을 ‘최고의 라면’으로 선정했다.

고인은 유족에게 “가족 간에 우애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날 농심 측은 지난해말 마지막 업무지시에서도 고인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것에 그치지 말고, 거짓 없는 최고의 품질로 세계 속의 농심을 키워라”는 메시지를 남겼다고 전했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이날 추적추적 비가 내렸지만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장남인 신동원(63) 농심 대표이사 부회장, 장녀인 신현주 농심기획 부회장, 차남 신동윤 율촌화학 부회장, 삼남 신동익 메가마트 부회장, 막내 신윤경 씨와 사위 서경배(58) 아모레퍼시픽 회장 등이 빈소를 지켰다. 이날 오전 송용덕 롯데지주 부회장이 빈소를 다녀갔고, 전날에는 신격호 회장의 딸인 신영자 롯데복지재단 전 이사장이 들러 고인을 추도했다.

일본 체류 신동빈 롯데 회장은 근조화환

또 일본에 머무르고 있는 신격호 회장의 아들인 신동주 SDJ 코퍼레이션 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근조 화환을 보냈다. 고인은 지난해 1월 몸이 불편해 신격호 회장의 빈소를 찾지 못했지만, 아들인 신동원·신동윤 부회장은 조문했다. 반세기 넘게 이어지던 농심가(家)와 롯데가의 묵은 앙금이 풀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국수인 조훈현 9단은 이날 오전 빈소를 다녀갔다. 조 9단은 평소에도 농심을 자주 방문해 바둑 애호가인 신 회장과 바둑을 즐겼다고 한다. 올해로 22회째를 맞는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대회는 “중국의 바둑 열기를 신라면 인지도로 연결하는 방법을 고민하라”는 신 회장의 주문에 따라 시작됐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해가 저문 뒤 조문을 했다. 최 회장은 고인의 삼남 신동익 메가마트 부회장과 신일고·고려대 동기다. 그는 “고인은 고등학교 때 많이 뵀었다. 잘못한 것이 있어 야단맞은 기억이 있다. 돌아가셔서 많이 아쉽다”고 말했다. 구속 상태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조화를 보냈다.

고인은 별세 전 서울대병원에 10억원을 기부했다. 신 회장은 최근 5년간 일주일에 두 번씩 이 병원을 방문해 투석을 받았는데 의료진의 정성에 감동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장례는 4일간 치러진다. 30일 오전 5시 발인 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에 들른 뒤 오전 7시 농심 본사에서 영결식을 할 예정이다.

이수기·추인영·이병준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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