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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커피·휴지…14조어치 화물이 수에즈에 묶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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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지나다 좌초한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아래 사진)가 운하를 가로막으며 국제 물류가 심각하게 정체되고 있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 기다리는 선박들이 작은 점처럼 보이는 27일 위성 사진. [AP·로이터=연합뉴스]

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지나다 좌초한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아래 사진)가 운하를 가로막으며 국제 물류가 심각하게 정체되고 있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 기다리는 선박들이 작은 점처럼 보이는 27일 위성 사진. [AP·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3일 대만 해운업체 에버그린 소속의 22만t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가 좌초해 ‘글로벌 무역 동맥’인 수에즈 운하를 막으면서 ‘지정학’과 ‘지경학’이라는 국제정치학 용어가 자연스럽게 소환됐다. 152년 전인 1869년 11월 17일 개통해 현재 길이가 193.3㎞인 수에즈 운하는 유럽~아시아 항로를 9650㎞ 단축하며 글로벌 물류 혁명을 이끌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지정학적 급소에 운하를 뚫고 1956년까지 소유하면서 강대국으로 군림했다. 지중해와 아시아를 잇는 뱃길을 장악하고 면직물을 아시아에, 미얀마 쌀과 베트남 커피를 유럽에 각각 공급하는 길을 열었다.

수에즈 운하 마비, 배 429척 스톱 #1869년 개통 전 희망봉 항로로 회귀 #“통행 재개되려면 수주 걸릴 수도” #세계 교역량 12% 차지 운하 마비 #“컨테이너 빼낸 뒤 배 띄우기 검토” #글로벌 인플레 우려 커질 가능성 #한국, EU 수출이 9%…타격 우려

하지만 이번 사고로 무역선들은 물길이 다시 뚫릴 때까지 152년 전처럼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게 됐다. 이에 따라 당장 유럽과 아시아 간의 ‘커피·자동차 물류 대란’에다 가전 등 아시아가 강한 제조업 분야도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무역 ‘동맥경화’로 글로벌 경제 회복 속도가 더뎌지고, 미국발 인플레이션 우려에 기름을 부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152년 유라시아 항로 막혀 … 한 척당 3억 더 들여 희망봉 돈다 

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지나다 좌초한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 [EPA=연합뉴스]

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지나다 좌초한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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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은 수에즈 운하의 가치에 강대국들이 더욱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됐다. 미국·유럽연합(EU)·중국·러시아의 대중동 각축전의 무게가 이전과 사뭇 달라질 수도 있다.

당장의 문제는 세계 교역량의 12%를 차지하는 수에즈 운하의 마비 상황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수에즈운하관리청(SCA) 오사마 라비 청장이 “배가 며칠 안에 다시 뜨지 못하면 적재 컨테이너 수천 개를 내려 무게를 줄이는 ‘플랜C’를 가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지난 27일 보도했다. 해운·선박 전문가들은 이렇게 하면 운하 재가동에 앞으로 몇 주일이 걸릴 것으로 본다.

글로벌 경제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27일 기준 수에즈 운하 통과를 기다리는 선박은 429척으로 늘었다. 사고 당일인 지난 23일 약 100척에서 4배 이상이 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26일 기준 대기 선박 237대엔 약 120억 달러(약 13조5780억원)어치의 화물이 실렸다. CNBC방송은 해운정보업체 로이드 리스트를 인용해 물류 지연으로 인한 글로벌 손실이 시간당 약 4억 달러(약 4500억원), 하루 약 100억 달러(약 11조315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마음이 급한 일부 해운사는 아시아~유럽 노선에 투입한 선박의 뱃머리를 수에즈 운하 쪽에서 우회 노선인 아프리카 희망봉 방향으로 돌렸다. 희망봉 항로 우회는 67년 아랍-이스라엘 간 6일전쟁으로 폐쇄됐던 수에즈 운하가 75년 6월 재개통된 지 46년 만이다. 국내 최대 컨테이너 선사인 HMM 관계자는 “희망봉으로 돌아가면 9650㎞를 더 항해해야 하고 시간은 1주일쯤 더 걸린다”고 밝혔다. 대형 선박 기준으로 추가 연료비만 30만 달러(약 3억4000만원) 이상 더 들어간다. 여기에 더해 워싱턴포스트(WP)는 “(소말리아에 가까운) 아프리카 동북부 해역엔 오랫동안 해적이 출몰해왔고, 서아프리카 해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운송로’로 간주된다”고 지적했다.

27일 수에즈 운하를 막고 있는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 위성 사진. 수에즈운하관리청(SCA)이 29일 만조에 배를 예인하기 위해 작업을 하고 있다. 이 배는 지난 23일 운하 중간에서 좌초해 국제 물류에 큰 지장을 주고 있다. [AP=연합뉴스]

27일 수에즈 운하를 막고 있는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 위성 사진. 수에즈운하관리청(SCA)이 29일 만조에 배를 예인하기 위해 작업을 하고 있다. 이 배는 지난 23일 운하 중간에서 좌초해 국제 물류에 큰 지장을 주고 있다. [AP=연합뉴스]

물류난이 글로벌 인플레이션 우려를 가중시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블룸버그는 “이미 컨테이너와 선박 부족으로 글로벌 운송에 차질이 생긴 와중에 사고까지 겹쳤다”며 “여파가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확대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크리스 로저스 수석 무역분석가는 블룸버그에 “운송 지연으로 비용 증가 가능성이 커지면서 인플레이션 압력도 높아질 것”이라며 “단기적으로 소비재 재고 부족 가능성도 커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WSJ는 “미국에서 30년 만에 가장 고속의 경제성장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수에즈 운하 사태가 터졌다”며 “소비심리가 증가하는 가운데 제품 가격의 급등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올해 미 경제성장률은 6~7%로 중국을 앞설 것으로 전망됐다.

에너지를 중심으로 원자재 가격 상승도 우려된다. 수에즈 운하는 주요 해상 원유 수송로라서 이번 사고는 국제유가 인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원유 자료 제공업체 K플러에 따르면 지난해 해상 운송된 하루 평균 3920만 배럴의 원유 중 1740만 배럴이 수에즈 운하를 지나갔다. 국제유가는 이미 들썩거린다. 지난 27일 서부텍사스유(WTI)·브렌트유·두바이유 등이 모두 4% 넘게 오르며 배럴당 60달러를 넘겼다. 다만 한국무역협회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수에즈 운하를 지나지 않는 중동·미국 등에서 원유의 대부분을 수입해 당장의 수급에는 지장이 없는 상황이다. 수에즈 운하를 지나야 하는 영국(0.3%)·노르웨이(0.1%)산 원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하지만 수에즈에 선박이 다량 묶이거나 남아프리카 희망봉 항로로 우회하는 선박이 늘면 전 세계적으로 선박의 화물 적재 여유 공간이 줄면서 아무래도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포클레인이 좌초한 에버기븐호 예인을 위해 수에즈 운하를 준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포클레인이 좌초한 에버기븐호 예인을 위해 수에즈 운하를 준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물류 마비의 조기 해결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세계 2대 해운사인 MSC는 “운하가 뚫려도 당분간은 어려움이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기 선박이 워낙 많은 데다 항구에 하역 물량이 몰려 처리가 지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컨테이너선 운임 지표인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의 유럽 항로 운임은 사고 뒤인 지난 26일 1TEU당 3742달러(약 420만원)로 한 주 전보다 77달러 올랐다. 지난해 SCFI 유럽 노선 평균 운임은 1204달러였다.

수에즈 운하는 세계 무역량의 약 12%가 통과하며, 지중해에서 홍해로 가는 화물의 약 60%는 한국·일본·중국 등 동아시아로 향한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보도했다. 신문은 지난 5년 동안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동아시아로 가는 화물은 약 2배로 늘었다고 전했다.

한국·일본·중국 등 동아시아 산업국가에 수에즈 운하는 유럽으로 이어지는 핵심 통상로다. 관세청 통계에 따르면 한국 무역에서 유럽연합(EU)이 차지하는 비율은 2020년 전체 5125억 달러의 수출 중 9.34%, 4676억 달러의 수입 중 11.87%에 이른다. 선박편으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교역품은 자동차·자동차부품·기계·석유제품·철강 등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에 따라 운하의 장기 폐쇄는 아시아와 유럽에 대한 지정학적 타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운송 동물 아사 위기=수에즈 운하가 막혀 대기 중인 선박 중 20여 척에 실린 살아 있는 동물 수천 마리가 굶어 죽을 위험이 있다고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28일 보도했다. 대부분 유럽에서 중동으로 이동 중인 가축으로 추정된다. 한 관계자는 운송 중인 가축은 약 9만2000마리로 추정되며, 배에는 사료와 물이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집트 농림부는 28일 “운하 재가동이 지연되면서 배에 실린 가축의 상황이 우려된다”며 “수의사 등을 파견해 가축을 점검하고 사료 등을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채인택 국제외교안보 에디터
김영주·이승호·이민정 기자 ciimccp@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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